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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공을 물어간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호 15면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 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황동규, 풍장(風葬)1>

투어 에세이 ①페블 리치 링크스

황동규 선생의 시 ‘풍장’을 떠올린 것은 7번 홀에서다. 세찬 바람을 마주하고 서서 가만히 태평양을 굽어본다.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기’에는 이곳이야말로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반도의 끝자락.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태평양이 포효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바람 속에 바닷새가 날개를 펼치는 곳.

미국 사나이 새뮤얼 F B 모스는 이곳에서 희망을 봤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깔았다. 페블 비치 골프 링크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1919년의 일이다. 페블 비치는 전 세계 골퍼들이 가장 라운드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골프장이 되었다. 골프의 전설, 잭 니클로스는 이렇게 페블 비치를 찬양했다.

“내 생애에 단 한 번의 라운드 기회가 남아 있다면, 페블 비치를 택하겠다. 나는 이 코스를 발견한 순간 사랑에 빠졌다.”

골퍼의 지상 천국이라는 페블 비치를 만난 것은 2월 26일. 페블 비치 조경 파트에서 26년간 일했다는 재미교포 강봉옥(76) 선생의 도움을 받아 겨우 부킹에 성공했다. 시간표를 받아든 순간 가슴이 벅찼다. 라운드를 앞두고 그토록 마음 설렜던 적이 있었던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

18홀을 함께할 파트너와 인사를 나눴다.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온 50대 사업가 마이크와 그의 부인 일레인, 그리고 마이크의 사업 파트너 그렉. 마이크와 그렉은 페블 비치 링크스 코스에서만 세 번째 라운드라고 했다.

경기 진행을 맡은 ‘스타터(Starter)’가 우리 팀을 불러 모은다. ‘가이(Guy)’라는 이름표를 단 60대 할아버지다.

“ ‘클린턴’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클린턴’은 ‘멀리건’이라고도 하지요. 왜 ‘클린턴’이라고 부르는지는 다들 아시지요? 클린턴이 이 코스에서 78타를 쳤다는데, 그때 멀리건 20개를 받았다지요. 기브도 열댓 차례 받았다나 뭐라나.”

모두 큰 소리로 웃는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안개처럼 사라진다. 골프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 골프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국적과 나이ㆍ성별을 초월해 금세 친구가 된다.

우리는 골드 티잉 그라운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전장 6348야드.

1번 홀(파4ㆍ345야드)부터 티샷이 잘 맞았다. 이 홀은 길지 않아 무리할 필요가 없다. 페블 비치에선 파 세이브만 해도 성공이라지 않는가.

4번 홀부터 오른편으로 검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태평양이다.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하면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4번 홀은 길이가 308야드밖에 되지 않지만 투 온이 어렵다. 잘 맞았다 싶은 샷도 바람에 밀려 러프 속으로 사라진다. 페블 비치에서 하필 비바람을 만나다니. 어느새 비옷으로 갈아입은 그렉이 한마디 한다.

“지난해 7월 라운드할 때는 날씨가 화창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같은 날씨가 더 좋다. 이곳은 페블 비치이니까. 페블 비치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언제 활짝 갰는가 싶게 비바람이 몰아친다. 이게 바로 페블 비치에서 라운드하는 묘미 아닐까.”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궂은 날씨 속에 계속된 라운드. 발 아래 태평양이 포말을 머금은 채 아우성친다.

6번 홀. 소나무 한 그루가 수호신처럼 6번 홀을 굽어본다. 페블 비치 로고에 새겨진 바로 그 소나무. 늠름하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저 자리를 지켜 왔을까. 저 아름다운 자태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저 자리에 서서 비바람을 이겨낸 소나무는 일희일비하는 인간의 가벼움을 비웃는 듯하다.

홀을 지날수록 길이가 길어진다. 9번 홀(파4)은 441야드나 된다. 강한 맞바람 때문에 페어웨이 우드로 두 번째 샷을 해도 그린에 명중하기 어렵다. 홀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다르다. 당연한 말이지만 페블 비치에서는 클럽 선택과 거리 조절이 스코어를 좌우한다.

어느새 18번 홀(파5ㆍ532야드). 페어웨이 왼편에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아, 바람, 바람, 바람…. 빗줄기가 굵어진다. 모자를 눌러 쓴 일레인은 미스 샷을 연발하면서도 표정이 밝다. 천신만고 끝에 온그린을 해도 스리 퍼트가 기다린다. 그린 위에 내려놓은 공이 저만치 굴러간다. 2000년 US오픈 당시 존 댈리(미국)는 이 홀에서 14타를 쳤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

18홀을 마친 뒤에야 깨닫는다. 페블 비치는 ‘가시 돋친 장미’라는 사실을. 비바람 속의 페블 비치, 아스라이 수평선을 더듬던 나는 아름다운 장미 가시에 심장을 찔린 듯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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