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에 손든 태 군부독재/쿠데타 1년3개월만에 쫓겨난 수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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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산층 자각·민중의 승리/동남아서 설땅 잃은 군정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전통으로 삼던 나라가 또하나 사라져가고 있다.
태국 유혈시위가 민주화를 요구해온 군중의 승리로 굳어진 것이다.
군장성 출신의 수친다 크라프라윤 태국 총리는 집권 5개당 연합체가 군부의 정치개입을 제한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재출하기로 합의하자 시민·국왕·정치권 등 모든 지지기반을 상실했음을 인정해 쿠데타로 집권한지 1년3개월만에,총리로 취임한지 45일만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총칼을 앞세워 『이권이 있는 곳에 군인이 있다』고 할 정도의 기득권층이었던 군부가 맨손으로 저항한 중산층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태국의 시위대가 이번 승리를 얻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그같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에서도 더이상 군부 독재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된 것은 큰 값어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태국은 32년 왕정이 무너진 이래 60년간 군부가 집권해온 나라였다.
현역 장성이 55%인 상원의원은 군부가 전원 지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각 지방의원도 32%가 영관급 장교들이 겸직하고 있다.
이들은 국회가 열리면 군부대를 떠나 국회에 출석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밖에도 모든 정부기관 및 언론기관의 고문직,경제·문화단체의 대표나 이사를 군인들이 도맡아왔다.
항만·해운은 해군,공항·항공은 공군산하에 두는 등 군아래 정·경·사가 놓여 있었다.
태국의 이번 시위는 이같은 총체적 군부 지배의 사회구조에 대한 중산층의 도전이었다.
태국의 중산층은 80년대 들어 급격히 팽창했다. 매년 10%에 가까운 실질성장률을 보여온 경제성장과 의무교육의 확대,언론의 발달이 중산층의 정치적 자각을 자극한 것이다.
군부지배의 사회구조가 지속돼 권력과 부의 재분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태국의 발전은 멈춰버릴 것이라는 자각이다.
수친다총리의 사임으로 중산층의 욕구가 당장 충족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수친다를 지지하던 집권 군부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좀더 보전하기 위해 등을 돌려 수친다총리를 퇴진시켰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앞으로 군부의 기득권을 줄여 나가는 태국 정치사의 분수령이 될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웃 동남아시아의 군부 독재국가들에도 뜨거운 감자를 안겨준 셈이 됐다.
군부 독재에 시달려온 인근 국가들에 태국 사태는 큰 자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도 최근의 급격한 경제발전이 집권세력에 대한 중산층의 도전을 재촉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역시 시장경제개혁이 궤도에 오르게 되면 같은 갈등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태국의 경우 군부와 국민 모두에게 큰 영향을 갖는 국왕이 존재함으로써 민주화를 앞당겼다고 볼 수 있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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