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악순환 “4년에 한번 꼴”/독재로 얼룩진 태 근대정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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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순수 민간통치는 73∼76년 겨우 3년뿐/시민의식에 눈뜬 중산층의 불만 폭발
태국의 근대정치사는 17번의 쿠데타로 얼룩져왔다. 지난 32년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것부터 군과 관료들의 합작품이었다. 이후 태국역사에서 순수 민간정부가 들어선 것은 73년부터 76년까지 단 3년간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군사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정부라고 평가받는 80년대 프렘총리와 그를 합법적으로 승계한 차티차이총리 역시 군장성 출신이기 때문이다.
태국 군부의 정치개입은 여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번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야당의 지도자들도 대부분 군출신이다. 잠롱 스리무앙 팔랑탐당 당수와 차발리트 욘차이유트 신희망당 당수,사난 카존프라사트 민주당 당수도 군장성 출신이다.
태국군부의 정치개입은 이처럼 뿌리깊다. 군의 정치개입이 아예 제도화된 적도 있다. 태국이 이제까지 채택한 몇몇 헌법은 쿠데타를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력승계의 수단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태국군의 정치개입이 이처럼 계속되는 이유는 우선 사회세력,특히 정치엘리트 가운데 근대적 의미로 군처럼 잘 조직된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태국의 정당은 역사가 일천하다. 32년 입헌군주제로 정체를 바꾸면서도 왕정에 대한 역사적·종교적·전통적 충성은 손대지 않은채 민족적·군사적 요소만 추가시켰다. 시민혁명의 성격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정당의 설립을 50년대까지 금지해왔다. 태국의 정치엘리트들은 자기들끼리 번갈아 파벌정치를 일삼는 것으로 만족해왔다. 이 집단에 포함되는 세력들이 바로 32년 쿠데타에 얽혀있는 군·행정관료·귀족들이다.
이같은 지배구조가 이제껏 큰 도전을 받지않은 까닭은 태국의 전통적인 지배­종속의 사회풍토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태국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위 아래가 구분되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보호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며 따른다는 것이다. 정당은 물론 행정부의 기능도 생산·이념·효율성이라는 근대적 요소보다 상관과 부하 사이의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한다는 행태를 보여왔다.
지배계층 가운데 유독 군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데 우월한 모습을 보여온 것은 파벌정치가 제도화된 권력승계의 원칙을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권력쟁탈을 위해 폭력적 수단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군이 그럴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는게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이 행정부만으로 극히 제한된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수도 방콕의 행정권력을 장악하는 것만으로 쉽게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법·언론·기업 등 나머지 기관은 핵심적 의사결정 과정과 거의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군의 거사가 그다지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측면이 있다. 냉전체제 아래서 반공과 국기수호는 군에 좋은 명분을 주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은 태국군이 항상 반공적인 태도를 견지해 쿠데타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외교적으로도 불편이 없었다.
지난 73년 유혈시위로 민선정부를 세우고도 76년 우익쿠데타에 쉽게 무너진 것은 이같은 정치·문화구조에 기인한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이같은 태국의 전통적인 지배구조가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의무교육의 확대 및 언론이 발달하면서 중산층을 중심으로 이른바 시민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태국 경제는 80년대 이래 연 8% 이상의 실질성장률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인구중 80%를 차지했던 농업인구가 15년도 안되는 사이에 60%로 감소했고 소득격차도 심화했다. 그런데도 정치권력은 소수의 독점상태에 놓인채 신분상승의 기회를 차단당하고 있다는 구조적 불이익에 눈돌린 대중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가 지난 73년의 유혈시위와 달리 중산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사실이 그점을 잘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시위는 본질적으로 태국 최초의 시민혁명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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