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간 무한경쟁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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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채점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사무실 1층엔 쇠창살로 가려진 방이 있다. 1994년 이후 지난해까지 해마다 60만 명가량의 수험생이 치른 수능 시험 성적 결과가 여기에 보관돼 있다. 전체 초.중.고 학생의 1%가 학업성취도 평가라는 이름으로 치른 국어.영어.수학 등 5개 과목 성적도 있다.

평가원 관계자는 "모든 학교.학생의 학력 정보가 이 안에 다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자료는 지난 13년 동안 접근 금지 대상이었다.

하지만 27일 서울고법의 판결로 접근을 불허했던 이런 학력 정보가 공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1심 판결은 수능 성적만 공개하라고 했지만 2심 판결은 공개의 범위를 더욱 넓혔다. 수능 성적뿐 아니라 재학생들의 교과목 성적도 공개하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교육부가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학교 간.지역 간 학력 격차 실태가 유리알처럼 드러날 수 있다. 그 결과 고교 등급제 금지 등 교육부의 '3불 옹호론'도 견뎌내기 힘들 것으로 교육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 수능 등 정보 공개 효과는=수능 성적과 학업성취도 평가 성적이 공개될 경우 평준화 체제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 간 학력 격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학교 간 수능 영역 성적.등급 등의 비교는 물론이고 주요 과목에 있어서 평균 성적의 비교도 가능하다. 서울 시내에서 강남과 강북 간 객관적인 비교도 가능해진다. 어느 지역 학교의 학력 수준이 낮은지도 학부모 등 교육 수요자가 알 수 있다.

원고 측인 이명희 공주사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지금까지 학생들만 경쟁했다면 정보 공개 이후엔 학교도 경쟁하고, 교육청도 경쟁해야한다"며 "학력 수준이나 교육의 질이 향상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 관계자는 "고교 간 격차는 현 정부가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던 금기사항이었다"며 "정보 공개 결과 학력 격차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난다면 이런 상황을 그냥 덮어 두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08 대입에 영향 미치나=교육인적자원부는 즉각 상고해 시간을 벌겠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려면 앞으로도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그때쯤엔 이미 올해 수능 공고가 끝난다. 원점수는 물론 표준점수.석차백분율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9등급 성적만 공개하는 올 수능은 이번 판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그러나 등급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수험생들로부터 정보공개 소송을 당할 수 있어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올해 대입에서 상당수 상위권 대학이 수능 반영 비율을 높여 놓은 상태여서 등급 정보만 알고 있는 수험생들은 자신의 성적을 정확히 알기 위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전혁 인천대 교수는 "이번 판결의 취지는 2008학년도 대입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교육부는 원점수 등 일체의 정보를 모두 공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 외국에선 어떻게=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 학력 정보 공개는 기본이다.

미국에서는 2002년부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교육법안(No Child Left Behind Act)에 따라 주 정부와 지역 교육구는 중.고교 학부모들에게 영어.수학.과목 과목의 학교 성적 등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구는 대입 수능 시험인 SAT 성적평균도 공개한다.

공개의 목적은 질 개선이다. 성적 향상이 안 되는 학교에 대해서는 교육청이 개입해 경영진을 교체하기도 한다. 영국도 정보를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질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학교에 대해 폐교 조치한다.

강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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