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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무념의 경지라야 좋은 북 나오죠|북에「생명」넣기 5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둥둥 둥둥둥…」
살아 생전 오로지 북소리를 만들어 온 북쟁이 윤덕진씨(67·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327의59)에게 북은 한이며 사랑이고, 슬픔이며 환희다. 아니 이 세상 모든 것이며 그의 생명이라고 해야 옳다.
그는 북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자신의 희로애락을 북에 모조리 쓸어 넣으면서 북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북은 가죽과 나무로 만들어진 무생의 조합체가 아니라 복잡한 표정을 갖고 그의 심중을 파고들며 갖가지 언어로 속삭여 오는 생의 반려자이기도 하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63호 북메우기의 고장(인간문화재) 윤씨네 가문은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자리잡은 북소리의 맥을 이어오는데 4대 1백50여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털어 넣어 온 골수 「북정이」집안이다.
그의 조부 윤억판씨는 경남 하동에서 죽은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사람이라 하여「갖바치」라 불리면서 갖은 천대를 무릅쓰고 신들린 듯 북메우기(만들기)에 매달렸다.
오로지 북소리에 취해 인생의 가난과 회한을 달래면서 살다 간 조부 밑에서 그의 아버지 윤랑구씨 역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손길에 이끌려 북메우기에 빠져들었다.
자나깨나 북, 북소리만 들어오면서 자란 청년 덕진이 어깨너머로 익힌 솜씨로 만들어낸 북이 빚어낸 소리는 그의 아버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3대독자인 아들이 밥도 되지 않고 사람대접 제대로 해주지 않는 북메우기에 신경을 쏟는 것을 보고 회초리를 들어 다스리며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몸으론 말없는 선생이 되어왔던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남겨진 가죽·나무토막들을 추슬러 자연스럽게「가문의 업」인 북 만들기에 또 한생을 털어 넣기에 이른다.
당시만 해도 소를 잡는 백정다음 가는 직업으로 갖바치를 천하게 여겨 설움을 받아야 했던 그의 일은 입에 풀칠하기조차 여의치 않았다.
칡뿌리의 찌꺼기로 죽을 쑤어먹고 굶기를 밥먹듯 한 식구들은「운명의 굴레」에서 탈피시키기 위해 그는 한때 전남 화순에서 경찰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총을 맞아 팔에 상처를 입고 4년만에 이 직업을 떠나야 했다.
상이 경찰인 까닭에 당시 원호청 주선으로 철도청 조차수 생활을 4년 남짓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기를 흔들며 북이 빚어내는「심장의 고동소리」와 같은 마력의 소리에 끌려 일이 끝나면 북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그에게 있어 북은 모든 감정의 탈출구였다.
결국 그는「송충이가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듯」원 위치로 돌아왔다.
식구들에게 찌든 가난의 어려움을 감수하게 했던 그는 스스로 북 만드는 일에 처절하리만큼 가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가죽과 나무를 엮어 북 모양이 되었다 해서 북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만든 북의 소리가 듣는 이들에게 아무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참히 자신이 만든 북들을 찢어버리기 일쑤다.
그러고는 며칠이고 두문불출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사람이 진실 돼야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토하듯 무욕·무념의 마음을 가져야 좋은 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17세부터 시작된 그의 북쟁이 인생을 통해 그가 그 동안 만들어 낸 북은 2만여개. 아니 미처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지만 이 세상에 탄생한 것은 불과 4천∼5천여개에 이르리라는 것이 그의 어림짐작이다.
그는 보통 한개의 북을 만들어내기 위해 똑같은 북을 5∼6개 만들어 그중 최선을 선택해야 직성이 풀리는 강한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만들 수 있는 북은 궁중에서 아악에 사용하던 좌고·건고·용고 등을 포함, 모두 20여 가지에 이른다.
그가 아끼는 대표작은 정부종합청사 민원실·경기도청 종합 민원실에 있는 신문고 및 국립극장에 놓여있는 지름 1m80㎝의 대형 용고 등이다.
그가 만든 가장 큰북은 충북 제천 강천사에 놓인 대형 용고로 지름이 2m30㎝에 달하는 북면과 북통을 메우는데 황소 여섯마리의 가죽을 이용, 1년6개월을 씨름해야 했다. 또 불국사·통도사·설악산의 신흥사·해인사·낙산사 등 전국 유명 사찰에 있는 대부분의 법고가 그의 작품이고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게임 개막식에 등장한 북 대부분이 그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그는 보다 심금을 울리는 북을 만들어내기 위해 큰 작품을 만들 때엔 특히 전국의 소 시장 을 뒤져 건강한 소의 윤기 있고 흠집이 없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쇠가죽을 얻어내는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쇠가죽이 가죽에서 소리를 내고 악기로 생명을 얻기까지에는 그 나름대로 얻어낸 비법의 과정을 거처야 한다. 백회와 닭똥·오줌 등을 섞은 물에 4∼5일 정도 담가 가죽의 이물질을 빼내는 작업을 하기도 하고 북의 크기·소리에 맞는 두께의 가죽을 만들기 위해 칼로 가죽을 밀어내 그의 손은 늘 살갗이 벗겨지고 손톱이 성할 날이 없다.
북통에 가죽을 메우는 일이 최근 많이 기계화됐지만 그는 소리의 멋을 결정하는 이 일을 기계에 맡길 수 없다고 고집, 편치 않은 자신의 팔을 이용해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기계를 들이대 소리를 팽팽하게 조절해주는 개량북 제작도하지 않고 있다.
가죽을 만져 몸에 밴 이상한 냄새 때문에 학교에서 늘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 괴로워했던 큰아들 종국씨(32)가 최근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나섰고 자석에 끌리듯 결국 세아들과 두 사위 모두 이 일에 뛰어들어 4대째 가업을 잇게 됐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만든 각종 북을 모두 내놓아 보이는 북 전시회와 통일이 되면 북녘 땅에 한민족의 정서를 하나로 묶는 큰북을 선사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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