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천재도 운 없으면 탈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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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09회 입단 대회가 28일 시작된다. 남자 입단자 2명이 결정되는 5월 19일까지 20일 동안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지옥의 레이스'가 펼쳐지는 것이다.

흔히 지옥문이라 하지만 이보다 더한 지옥문이 있을까. 일류 프로기사가 되면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연간 수억원의 상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프로에 입문하는 과정을 보면 천재조차도 운 없이는 어림없다. 나이 제한도 있다. 입단 대회가 열리면 동네에선 저마다 천재 소리를 듣는 소년 고수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와 그들을 키운 도장의 사범들까지 모두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된다.

◆ 프로 입문 과정= 동네 바둑교실에서 바둑을 배우는 유치원 어린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 중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은 1~2년 만에 선생이 가르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현역 젊은 프로기사에게 3~5점에 버틸 수 있는 수준(아마추어 3~5단)이 된 이들은 저마다 '이창호'를 꿈꾸며 전문 도장으로 가게 된다.

전문 도장으로 가는 시기에 대해 프로 배출 100단을 돌파한 허장회 9단(허장회도장)은 "초등학교 1~4학년 때 오면 유망하고 5,6학년은 조금 힘겹다"고 말한다.

출발이 늦었으나 대성한 서봉수 9단이나 유창혁 9단의 경우에 대해선 "그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라며 웃는다.

이들은 도장에서 공부하며 한국기원이 3개월에 한번 뽑는 연구생 선발전에 나간다. 연구생은 1~10조까지 120명이 있는데 매달 꼴찌 4명이 탈락하고 새로 4명이 진입한다. 일단 연구생이 되면 만 18세까지 프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로는 고사하고 연구생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연구생 10조에서 버티려면 잘나가는 프로기사에게 선(先)으로 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1조에서 10조까지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1~3조는 실제 똑같고 이들과 10조는 겨우 선 차이라고 한다. 선이라면 흑으로 둔다는 얘기다. 프로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지만 연구생 되기는 더 어렵다는 한숨이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이번 입단 대회에 나선 연구생 1~3조의 실력은◆

"웬만한 프로는 다 안 되죠. 최상위 20~30명을 제외하면 이들이 더 세다고 봐야죠." 도장을 운영하는 프로기사의 얘기인데 극구 이름을 밝히지는 말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연간 남자 7명, 여자 2명이 프로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이렇게 관문을 넘어선 초단들이 9단들을 무 베듯 꺾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건 돌풍이 아니라 예고된 태풍이고, 너무 높은 문턱을 견지해온 프로 바둑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프로기사는 50년 역사에 현재 200명 정도가 활약하고 있다.

◆ 초단 돌풍의 명암=프로 석 달 만에 승률 1위(93%)를 달리는 한상훈 초단이나 배준희 초단이 2007한국리그에서 2장으로 뽑힌 것, 그들이 초일류 기사들을 자주 격파하는 것 등에 놀라는 사람은 바둑 동네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1988년생인 한상훈 초단이 지난해 12월 막차로 입단했는데 이 기회를 놓쳤으면 그 역시 연구생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유망한 바둑 지망생이 중도에 떠나는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 결국 청소년 바둑인구가 사라지고 바둑교실도 어려워지고 바둑계 전체가 침체될 것이라는 우려가 프로기사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연간 2명을 뽑는 여자 쪽은 세계 청소년대회 우승자조차 바둑을 접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프로바둑계는 입단 대회를 고시 패스보다 힘든 '지옥문'이라며 은근히 자랑해 왔고 지금도 문턱 낮추기를 완고하게 반대하고 있다. 너무 힘든 입단 대회가 바둑의 지옥문이 될 수 있다는 경고에 머리를 모아야 할 때가 됐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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