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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안 돋보인 '시라크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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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차기 프랑스 대통령이 곧 결정된다. 이제 1995년 첫 당선 뒤 2002년 재선했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엘리제궁을 떠날 때가 됐다.

시라크의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좋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의 경제.사회 정책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외교에 대해서는 대부분 만족한다.

그는 샤를 드골이 주창하고 프랑수아 미테랑이 계승한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전통적 외교노선을 견지해 왔다. 초강대국에 대한 프랑스의 독립성, 국제 문제에서의 적극적인 역할, 유럽연합(EU) 건설의 주도, 개발도상국들과의 특별한 관계 등이 그 뼈대다.

하지만 시라크도 집권 초기에는 외교 정책이 달랐다. 그는 핵실험 재개를 선언해 전 세계적인 반발을 불렀다. 당시 프랑스는 이기적이고 거만한 존재로 여겨졌다.

1996년 그는 드골 정권 때 탈퇴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재가입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미국이 거부한 데다 97년 프랑스 의회의 주도권이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이끄는 좌파 사회당으로 넘어가면서 좌절됐다. 취임 초기의 이런 사례를 봐서는 시라크가 훗날 미국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키 어려웠다.

그러나 시라크는 이라크 전쟁에 대놓고 반대하면서 외교 노선을 분명히 했다. 전 세계 상당수 국가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시민들도 전쟁의 위험성과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러나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독재자를 몰아내고 정의를 이루는 역할을 자임했다. 게다가 사상 유례가 없는 절대 강국이었다.

그래서 시라크의 용기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더욱 돋보인다. 그는 초강대국 미국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용기를 보여 줬다. 또 미국이 군사적으로 쉽게 이길 순 있어도 그 뒤에 서구 세계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 심화, 중동의 불안정화, 테러 급증 등 부작용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비록 미국이 초강대국이지만 세계가 결코 일극화되지는 않았음을 간파했다. 미국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의 견해를 다른 국가에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고립 위기에 처했지만, 결국 고립된 것은 파리가 아니라 워싱턴이었다.

프랑스는 워싱턴에 '노'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도 아니었다. 독일이나 러시아도 그럴 수 있었지만 시라크의 용기와 빠른 판단에 의해 프랑스가 그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 결과 시라크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서방 지도자가 '국제법 준수와 전쟁 반대'라는 원칙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에 반대하는 모습에 열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이런 외교적 입장은 서로 다른 문명이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이른바 '문명의 충돌' 이론에 대한 반론 역할을 했다. 그의 정책은 개인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아시아.아랍.러시아 등 다른 문명에 진심으로 관심이 많았고 개방적이었다.

시라크의 가장 큰 실책은 EU 헌법 비준 실패다. 이로 인해 새로운 유럽을 만드는 기관차 역할을 했던 프랑스가 오히려 EU라는 기차를 멈추게 한 셈이 됐다. 현재 유럽통합 작업은 소강상태이고 프랑스의 위상도 낮아지고 있다. 차기 프랑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유럽통합 작업을 다시 가속화하는 것이다. 시라크는 환경보호나 기후 변화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선진국.개발도상국 간의 연대에도 관심을 쏟았다.

그는 아시아에 대한 열정과 지식이 많았지만 현지 국가와의 협력을 눈에 띄게 강화하지는 못했다. 아시아가 국제 무대에서 부상하면서 차기 프랑스 대통령은 아시아에 대한 존재감과 활동을 늘려야 한다. 시라크가 재임 기간에 행했던 내치.외교와 관련한 수많은 정책 중에서 오직 하나를 꼽자면 분명 그가 용기있게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던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스칼 보니파스 프랑스 국제관계 및 전략문제연구소(IRIS) 소장
정리=이승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