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깡패' vs '아랍 자존심' 후세인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14일 고향 티크리트에서 체포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65)의 삶과 정치 역정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서방은 그를 ‘국제 깡패’, ‘악의 축’, ‘죄수를 상대로 생화학무기 실험한 무자비한 인간’으로 몰아세운다.반면 일부 아랍인들은 그를 이라크의 살라딘(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을 재정복한 이슬람 세계의 영웅), 아랍인의 긍지를 살린 혁명가, 아랍 자존심의 대변인으로 미화한다.

물론 모든 아랍인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진 않는다.무자비한 독재정치를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심지어 이슬람을 앞세운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도 7월 11일 공개된 육성 녹음테이프에서 그를 “이슬람의 원칙을 무시한 폭군”이라고 비난했다.

◇어린 시절=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 북부 티크리트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유복자로 태어났다.그 지역은 당시 이라크 인구의 65%를 차지했던 이슬람 시아파가 장악했다.

하지만 사담의 집안은 이슬람 수니파여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그의 이름 사담은 숙부인 하산 알마지드가 지었는데 ‘충돌하는 자’, ‘맞서 싸우는 자’라는 뜻이다.

후세인의 어머니 사브아는 사촌인 이브라힘 하산과 재혼했다.가난과 계부의 욕설과 구타 탓에 후세인의 어린 시절은 암울했다.참다 못한 그는 바그다드에 있던 외삼촌 카이르 알라의 집으로 옮겨 중·고등학교를 마쳤으나 이 시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군 장교였던 외삼촌이 영국에 반대하는 친나치 라시드 정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5년간 투옥됐기 때문이다.

◇정치 이력=후견인인 외삼촌의 고초를 본 후세인은 고교 때부터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주창한 아랍민족주의와 외세배격 사상을 추종했다.56년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이라크 반체제인사들이 친영파인 파이잘 2세 당시 이라크 국왕에 저항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을 조직했다.후세인은 행동대원으로 참여하면서 이라크 바트 아랍사회주의당에 입당,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이라크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웠다.내부 권력투쟁 과정에서 후세인은 60년 일부 바트 당원들과 함께 쿠데타 지도자 압둘 카림 카심장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돼 티크리트 감옥에 갇혔다.후세인은 간수를 매수해 탈옥,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로 망명했다.그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63년 바트당이 카심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세인은 처음에는 별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타크리트 출신들이 바트당을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다.66년 바트당 사무부총장에 선출됐으며 후견인인 아흐마드 하산 바크르 장군이 68년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자 혁명평의회 부의장에 임명돼 바트당의 2인자에 올랐다.

그는 바크르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하루에 18시간을 일하고 4시간만 잤다.아무리 피곤해도 약속 시간은 1분의 오차도 없이 지켰다.이렇게 철저한 자기 관리는 그의 권력 장악과 유지의 바탕이 됐다.

바크르 대통령이 79년 사망하자 후세인은 정권을 이어받아 바트당 사무총장·혁명평의회 의장·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됐다.이후 이란과의 전쟁으로 서방의 신임을 얻고,쿠웨이트 침공으로 서방의 적이 됐다.이라크가 유엔의 경제제재로 피폐화되는 와중에서도 전권을 휘둘렀지만 결국 올해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권좌에서 밀려났다.

◇통치술=후세인을 분석한 많은 학자들은 그가 어려서부터 적자생존의 법칙을 체득했으며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대중심리조작에 능하다고 평가한다.후세인은 스탈린을 추종,침실에 스탈린 관련 책을 쌓아두고 탐독했으며 스탈린처럼 억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60여명의 혁명평의회 의원을 공개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했다.권력유지를 위해 친위대와 보안군을 운영해 도전세력을 철저히 제거했다.

그는 결심을 하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주의자로 평가 받는다.이란과의 전쟁과 쿠웨이트 침공 등이 이러한 평가를 뒷받침한다.

민족주의적 바트당의 지도자로서 국민 심리를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도 알았다.그는 서민 출신임을 강조하며 국민의 동정과 호응을 이끌어 냈다.국민의 불만이 터질만하면 대규모 국책사업을 추진해 이를 무마했다.정치적 성격이 강한 국책 사업을 과도하게 벌인 것은 이라크가 산유국임에도 외채가 1천억 달러나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서방과의 관계=후세인에 대한 서방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사실 후세인 정권의 탄생과 유지에는 미국의 개입이 큰 역할을 했다.미국은 처음 중동에서 소련의 입김을 견제할 목적으로 그의 집권을 지원했으며 그를 통해 중동 석유의 안정적 확보와 지역 정세안정을 꾀했다.

79년 이란에 이슬람 혁명정권이 들어서자 “미치광이보다는 망나니가 낫다”는 이유로 이라크에 무기를 지원해 이란과의 전쟁을 부추겼다.이라크는 80년부터 8년간 이란과 전쟁을 벌여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차단했다.

하지만 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서방은 그를 적으로 규정했으며 이전에 서방의 원조로 건설된 군사·산업 시설의 상당수를 공습으로 파괴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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