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표 30%가 대세 가를듯/11일 뚜껑열릴 필리핀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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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안정속 개혁” 내세우는 라모스 선두
필리핀의 미래를 선택할 총선이 11일 실시된다.
지난 86년 등장한 코라손 아키노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선출되는 새로운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오는 6월 퇴임한다.
이른바 「피플스 파워」에 힘입어 집권한 아키노대통령이었지만 그녀의 재임 6년여는 필리핀의 뿌리깊은 엘리트지배구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채 무력한 모습뿐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는 필리핀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군부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등한히함으로써 재임시 일곱번의 크고 작은 쿠데타에 시달렸다. 아키노대통령의 군부에 대한 무관심은 군인들을 정치에 눈뜨게한 것으로 필리핀 정치를 후퇴시켰다고 비난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국회의원선거에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군 고위장교출신 후보가 20명이나 출마한 것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일부 국영기업 민영화,국가보조금 삭감,시장제한 철폐조치와 외채상환조건 경신 등 평가를 받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키노대통령의 경제정책은 대체로 실패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단이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생산(GNP) 7백25달러는 10년전 수준에도 못미치는 것이다. 이밖에 피나투보화산 폭발,6천여명이 숨진 태풍 등 하늘마저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이번 선거가 이처럼 기울어가는 필리핀을 일으켜세울 지도자들을 뽑아 필리핀 역사의 분기점을 만들 것인가 귀추가 주목된다.
마닐라 크로니클지와 ABS­CBN방송망이 합동으로 실시,7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현재 선두를 달리는 대통령후보는 코라손 아키노대통령이 공식 지지하고 있는 피델 라모스 전 국방장관(17.6%)이다. 그러나 미리암 산티아고 전 농지개혁장관(16.2%) 아키노대통령의 사촌동생이자 실업가인 에두아르도 코후안코(10.6%),여당인 필리핀 민주투쟁당 공천후보 라몬 미트라 하원의장(9.2%) 등이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호비토 살롱가 전 상원의장(5.3%),이멜다 마르코스(4.3%),살바도르 라우렐부통령(2.2%)은 당선권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선거는 전통적으로 3G,즉 금(Gold)·깡패(Goons)·총(Guns)이 좌우한다고 알려져 있다. 7천여개 섬으로 이뤄진 국가가 만들어낸 독특한 정치문화다. 매표·대리투표·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공공연히 자행된다.
일부 정치인과 군벌들이 거느리는 사병집단이 23개다. 올해초 선거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군부가 1백43개나 해체했다는데도 아직 그만큼이나 남아 있다. 이번 선거기간중 이미 폭력사태로 32명이 숨지고 6천명 이상이 다쳤다. 여론조사결과의 불리에도 불구,코후안코와 미트라하원의장의 당선이 유력시되는 것은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못한 30%의 부동표가 3G에 약세를 보일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뚜렷한 쟁점없이 진행되는 이번 선거의 또다른 관심사라면 바로 필리핀 정치의 이같은 봉건성을 얼마나 극복할 것이냐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선거가 그런 기대를 다소나마 충족시켜주리라는 관측도 있다. 35세이하 젊은 층이 전체 유권자의 절반을 넘고 이들은 중산층과 함께 코후안코가·아키노가·마르코스가·오스메니아가 등이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 제자리 걸음만 계속하는 정치에 신물나 하며 산티아고와 살롱가 후보를 예상이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기득권층의 저항에 따른 폭력소요와 쿠데타 등 선거의 뒤끝이 깨끗하지 못하리라는 우려도 있다. 결국 필리핀 유권자들은 안정속 개혁을 내세우는 라모스를 선택하는 현실적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게 지배적 전망이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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