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유골된 주인 곁 57년간 지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6·25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이 24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 부근 야산에서 이뤄졌다. 십자가는 미션 스쿨이었던 순천 매산고 학생의 것으로 추정된다. 하동=김태성 기자

시계는 10시30분에 멈춰 있었다.

24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화개장터 뒷산에서 진행된 6.25전쟁 학도병 전사자의 첫 유해 발굴 현장. 이곳서 나온 은제 회중시계는 찌그러진 채 57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투는 1950년 7월 25일 오전 5~8시 벌어졌으며 시계는 소지한 학도병이 전사한 뒤에도 몇 시간 더 째깍거리며 가다 멈춘 것으로 보인다. 회중시계는 당시 학생들에겐 귀중한 소지품 가운데 하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학도병 전사자들의 가매장지였던 흙더미를 2m쯤 파헤치자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사자 유해 20여 구는 가로 2.5m, 세로 6m 구덩이 속에 포개져 있었다. 어떤 유해는 새우처럼 웅크린 모습 그대로 발견돼 전사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해와 함께 발굴된 회중시계가 10시30분에 멈춰 있다.

전사자들은 국군 5사단 15연대 소속이었다. 15연대는 5사단과 7사단의 남은 병력과 전남 여수.순천 일대에서 자원 입대한 고교 1~3학년 학도병 184명 등으로 급조된 부대였다. 이들은 전차와 야포를 앞세운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유품 중에는 전사자들이 고교생임을 증명하는 물품이 더 나왔다.

학교나 서클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탁구라켓이 교차된 모양이 새겨진 혁대 버클, 직사각형 손거울, 학생복 안에 있는 단추 등이다.

발굴 유골의 치아는 아직 덜 발달돼 10대 청소년임을 말해줬다.

특히 전사자 유골의 오른쪽 가슴 위에 놓여진 타원형 거울에 부착된 작은 십자가는 유해의 주인이 전남 순천 매산고교(당시는 매산중학교) 학생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이용석(중령)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이 말했다.

좌우가 대립하던 6.25전쟁 직전 미션 스쿨인 매산고등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기독교도였다고 한다. 이 학교의 많은 학생이 북한군과 싸우기 위해 학도병으로 자원했다는 것이다.

전사한 학도병들의 시신은 마을 주민에 의해 화개장터에서 탑리로 넘어가는 야산 중턱의 양지바른 골짜기에 집단 가매장됐다고 한다.

한 유골 옆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M-1 소총탄 클립(8발들이 묶음) 7~8개가 놓여 있었다. 지급된 실탄을 거의 사용하지 못한 모양이다.

유해발굴감식단을 따라 온 임채영(77.당시 여수중 4년)씨는 "학도병들은 M-1 소총 실탄사격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됐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번에 발굴된 학도병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었다. 화개장터 뒷산의 80m 고지는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을 잇는 곳으로 섬진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다.

서울을 적진에 넘겨 준 책임을 지고 육군총참모장(현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 영남편성관구사령관으로 백의종군하던 채병덕 장군도 전사자들이 숨진 이틀 뒤 이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의 학도병 희생으로 북한군 진격을 12시간 지체시킬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벌었다.

유해 발굴에는 학도병들의 모교인 여수.여수공.순천.순천매산고 재학생 대표 8명이 참여했다. 정현조(여수고 2년.17)군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선배들을 존경한다"며 "그런 상황이 또다시 일어나면 나도 참전하겠다"고 말했다.

하동(경남)=김민석 군사전문기자 <kimseok@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