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사공 잃은 배"「유정호」 침몰|살길 찾아 각개 약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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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정희 대통령의 타계 이후 유정회 해체까지 꼭 1년이 걸렸다.
80년10월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됨에 따라 자동 해체되기까지의 1년간은 유정회로서는 기나긴 장례식 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1년장」 기간 중 유정회 소속의원들은 혹은 체념 속에 자신의 정치 역정을 마무리짓고자 했고, 더 많은 이들은 살길을 찾아 공화당 문턱을 기웃거렸고, 남달리「감」이 빠른 이들은 썩은 동아줄을 외면하는 대신 신군부의 실력자들과 인연을 맺고자 노력했다. 직능 분야 출신의 비정치인들은 대학이나 사회 단체 등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애를 태웠다.
중앙정보부 고위직 출신으로 유정회에 몸담았던 C씨는 공화당 원내총무까지 지낸 김택수 의원이 그 즈음 『C의원, 나는 사실 유신의 피해자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새삼 달라진 세상을 실감했다.

<"유신은 독재" 돌변>
김 의원은 얼마 후 (비록 김칫국부터 마신 결과가 됐지만) 국회개헌특위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박 대통령 휘하에서 보사부장관을 지낸 이경호 의원 (유정회)도 『유신은 반민주적인 조치로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고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유정회 의장이던 태완선씨는 『나는 이미 십수년 전에 정치를 포기했었는데 강제 징집을 당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공식 석상에서 대놓고 『유신 헌법은 독재 헌법』이라고 규정했다가 오히려 『진작 얘기할 것이지…』라는 주변의 빈축을 자초한 이도 나왔다. 태씨에 앞서 의장을 지낸 백두진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나는 주로 피동적이었다. 유정회도 협조하라 길래 들어갔다. 내 지론인 「자유의 국가 헌납론」과도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신헌법 제정에 개입한 당사자였던 한태연 유정회 의원은 당시『헌법의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절감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실패한 실습치고는 대가가 너무 엄청났다. 파천황의 실습이었다.
「안개 정국」이 짙어지면서 유정회의 진로는 몇 갈래로 나뉘어 논의됐다.
박 대통령이 서거한 마당이니 아예 의원직을 사퇴하자는 자폭론, 같은 여권인 공화당에 단체로 입당하자는 공화당 합류론, 명칭 변경론, 유정회 해체론 등이 두서없이 나왔다. 공화당에 들어가자는 측에서는 합류하기 전까지 유정회를 「공화 구락부」라는 명칭의 교섭 단체로 유지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몇몇 의원들은 발빠르게 지역구를 오가며 새해 (1980년) 달력을 돌리는 기민성을 보여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갈데까지 가보자>
군 원로였던 이종찬 의원 (83년 작고)은 앞장서서 의원직 사퇴서를 내던졌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사표가 반려되면 또 내서 모두 네차례나 사의를 표명했다. 여기자 출신의 박현서 의원도 사퇴를 주장하는 쪽이었다.
『10·26직후에는 당장 의원직을 내놓자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의원정수의 3분의1이나 차지하는 유정회가 빠져버리면 국회는 파탄 나니 갈데까지 가보자」는 관망론이 우세해졌지요. 이종찬 장군은 고집스럽게 사표를 냈는데, 난감해진 건 국회의장직 대행을 맡고있던 민관식씨였어요. 나한테 사표를 맡깁디다. 주는 대로 보관해 두었지요.』 (이영근 전 유정회 총무) 79년11월15일 유정회는 의원 총회를 열고 의장과 주요 간부진을 교체했다. 최영희 의원 (당시 원내총무·71)이 처음이자 마지막인「민주적 절차」에 의해 의장으로 선출됐다. 『야당이 공식 석상에서 「유정회 의원이 어떻게 뻔뻔하게 나와 있느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이럴 때일수록 일치 단결하자』는게 전임 태완선 의장의 이임사였다.
별로 반색할 것도 없는 의장직을 떠맡게 된 최 의장은 예비역 중장 출신의 4선 의원으로 국회·군내에 두루 신망이 있었다. 그는 또 신군부의 실력자로 부각되고 있던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결혼식에 주례를 섰던 인연을 갖고 있었다. 1958년 겨울 최영희 장군이 대구에서 2군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이화여대 1년생이던 이순자양의 부친 이규동 대령(2군 관리참모부장)이 맏딸의 결혼주례를 부탁했다. 상대는 일선부대 중대장이던 전두환군. 최 사령관은 흔쾌히 승낙했고 대구 제일극장에서 예식이 거행됐다. 최씨는 그 즈음 이규동씨와 동생 규승 (대령·수송과장)·규광 (대령·헌법부장)씨 등 삼형제를 모두 휘하에 두었던 적도 있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다. 이 때문에 유정회 의원들은 신임 의장의 배경에 은근히 기대를 품었던 모양이고, 소수는 그의 집을 드나들며「빽」을 활용해보라고 조르기도 했다. 한치 앞길도 알 수 없던 때였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정작 최 의장의 생각은 달랐다.

<한달 장고 끝에 사퇴>
『얼마전까지도 「유신만이 살길이다」며 깃발을 높이 들던 내가 전 장군 밑에 들어가 「새시대」를 외칠 수는 없었지요. 동료 의원 몇이 「교제」를 권유했지만 「예끼 여보, 주례 한번 선게 무슨 간판인가」하고 농담으로 돌렸어요.』
10대 국회 개원부터 「백두진 파동」으로 곤욕을 치렀던 백 국회의장은 79년12월3일 국회의장직을 물러났다. 한달넘는 장고를 거친 뒤였다. 백 의장이 유정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야당이 의장으로 모시기를 극구 반대해 파동이 빚어졌기 때문에 10·26직후 여러 사람이 그의 자진 사퇴를 권유했다.
서영희 의원 (유정회)은 박 대통령의 삼우제가 있던 날 의장 공관으로 갔다. 『의장님, 사표를 내세요. 이젠 사랑할 대상 (박 대통령)도 사라졌는데 무얼 망설이십니까. 야당에서도 벌써 아우성이고 국회도 곧 해산되지 않겠어요.』
백 의장은 『서 의원은 아직 세상을 모른다』고 나무랐다.『김종필씨도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만 얘기하는데 왜 서 의원은 사표를 권하느냐』고 했다.
12월1일 신민당의원들은 백 의장 불신임 결의안을 냈다. 『역대 정권 밑에서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아 기생해왔고…』 『인품과 덕망을 갖추지 못한 독선적 사고의 소유자로서 모든 의원들이 경원시 했으며…』 『김영삼 총재 제명 동의 안을 변칙 처리한 장본인으로 내외에 우리 국회를 웃음거리로 만든 책임…』운운한 결의안은 국회의 공식 문서로는 드물게 감정적인 경멸조의 표현으로 일관됐다. 초대 유정회 의장을 지냈던 백 의장은 결국 이틀 뒤 사퇴서를 제출했다. 여덟 쪽으로 된 사퇴서 말미에 그는 『떠나면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며 감사할 줄 아십시다』고 적어 야당으로부터 받은 수모에 완곡히 반응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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