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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조승희 사건과 미선이 효순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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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처음엔 별생각 없었다. "또 총기 난사야? 아무튼 미국이란 나라는…"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지난주 버지니아공대에서 벌어진 참사의 첫 소식을 들었을 때 말이다. 중국계가 범인이라는 보도에는 "괜히 동양 사람들만 욕먹게 생겼네" 하고 투덜댔다. 하지만 동포 1.5세인 조승희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모든 게 다르게 느껴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민족이 뭘까' 생각해 봤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한국인 1.5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부끄럽고, 덩달아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이 비참한 사태를 헤쳐 나가는 희생자 가족들과 미국민, 그리고 그 나라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적지 않은 교훈을 얻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은 지금도 개운치 않다. 2002년 미선.효순이 사건 때의 기억을 떨치지 못해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그해 6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 훈련 중이던 미군 2사단 장갑차에 치여 여중 2학년생 미선.효순이가 숨졌다. 한국에서 그런 일이 터질 때 늘 그렇듯이 수백 개의 시민단체가 모여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했다. "미군이 일부러 학생들을 깔아 죽였다"는 따위의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가 무수히 떠다녔다. 국민 감정에 불이 붙었고, 그게 반미 시위로 이어졌다. 집회 때마다 강갑차에 치인 여중생들의 끔찍한 시신 사진이 뿌려져 참석자(주로 젊은이들이었다)들을 흥분시켰다. '불쌍한 미선이.효순이, 모이자 시청 앞으로, 미국놈들 몰아내자' '월드컵 4강의 힘을 보여주자, 미국놈들 몰아내고 자주권 회복하자'. 그때 나왔던 구호들이다.

그걸로 어느 집단이 정치적 이득을 봤는지는 따지지 않겠다. 이미 지난 일이다. 하지만 숨진 여중생들의 시신 사진을 뿌린 데 대해서는 지금도 화가 난다. 죽은이의 명예를 그렇게 훼손해도 되는가. 그게 정말 미선.효순이를 위해서였을까? 난 지금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

입장을 바꿔보면 버지니아공대 희생자 가족들도 원통하고 억울한 게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관을 둘러메고 총장실을 점거한다고 해서 희생자들이 돌아오지는 못한다. "왜 범인인 조승희의 추도석을 만들어 놨느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어봐야 그저 화풀이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 이민자들을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숨진 희생자들의 영혼이 바라는 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미국에는 인종차별주의자도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노동자도 있고, 한국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33명의 죽음을 '죽음 이외의 것'으로 해석하고 이용하지 않았다. 미국 사회가 그걸 용납하지도 않았다.

나라마다 장례 문화가 다르다. 따라서 분노와 오열을 최대한 자제하고, 일단 상처받은 사람들을 감싸는 미국 방식을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배울 점도 적지 않아 보인다.

민족주의도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민은 장롱 속에 숨겨뒀던 돌반지.결혼반지 등 금붙이를 꺼내들고 나왔다. "금을 모아 나라를 살리자"는 호소에 다 같이 동참했다. 이 얼마나 좋은 민족주의인가. 거기에다 이성과 합리만 더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한국에 취업하러 온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을 수십 명 살해했다면 우린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성보다 감정이, 절제보다 분노가 앞서지 않았을까. 민족감정이 한껏 부풀어 올라 "그 나라 노동자 다 쫓아내라"고 악을 쓰지는 않았을까.

한국의 여중생들이든, 버지니아공대 대학생들이든, 동남아 노동자든 인종.국적.성별.연령과 관계없이 인간의 삶은 존엄하다. 또 모든 죽음은 산 자들을 엄숙하게 만든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기 때문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