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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길러 세계 선수 잡겠다"|세계 테니스 첫발 송형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우와-.』 지난 21일 92 KAL 컵 코리아오픈 테니스 선수권 대회 본선 1회전에서 맞붙었던 존 피츠제럴드 (호주)와의 경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서브앤드 발리 전형으로 무조건 네트로 치고 들어오는 피츠제럴드를 지나치게 의식, 얼마나 많은 스트로크 미스를 범했는가.
그가 32세의 백전노장에 한 때 세계 랭킹 25위까지 치달았던 강호 (현재 1백30위)이긴 하지만 6-1, 6-3, 이란 스코어의 패배는 세계 주니어 랭킹 2위인 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상처인 것이다.
그날 밤 꿈속에서 라켓을 곧추세우고 네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 들어오는 고수머리 피츠제럴드와 또 한차례 맞붙느라 잠자리를 땀으로 흠뻑 적시고 말았다.
이번 KAL컵은 내가 두번째로 치른 성인 대회다.
지난해 이 대회에서 예선 탈락한 반면 올해는 예선에서 세계 랭킹 1백87위인 모르간자니에 (오스트리아)와 국가 대표 김남훈 (현대해상) 형을 잇따라 격파하고 17세의 최연소 나이에 본선에 진출하는 성적을 올렸지만 패배는 그것이 예선이건 결승이건 언제나 차디찬 씁쓸함만을 안겨준다.
은혜 국교 4년 때인 84년 처음 라켓을 쥔이래 반복해 맛보는 승부의 비정함이다.
공부야 꼭 1등을 안 해도 상위권에 들면 남들이 말하는 일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스포츠에선 「우승」 외에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패배」란 단어를 가장 미워한다.
이 때문에 지기 싫어하는 나는 경기가 안 풀릴 때면 괴성을 지르고 홧김에 공을 장작 패듯 후려쳐 건방지다는 야유를 받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분노와 슬픔을 어떻게 달래란 말인가. 올해 고3 (마포고)이 되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제 주니어 무대를 벗어나 성인 대회에서 우승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고 싶은 욕심이 생겨나는 것이나.
스트로크 특히 투 핸드 백스트로크는 누구 못지 않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아직 첫 서브의 확률과 발리 등 네트 앞에서의 세기가 부족하다.
피츠제럴드와의 경기에선 서브리턴 또한 나빴다.
그러나 국제 대회 경험을 쌓을수록 자꾸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와 키가 같은 (1m73cm) 마이클 창 (미국·세계 6위)이 내 나이에 프랑스 오픈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힘이 좋은 미국 선수들과 부대끼며 생활, 서구 선수들의 파워에 익숙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창보다 몸놀림이 다소 둔하고 스트로크의 기교에서도 뒤지지만 좀더 해외 투어를 돌며 기량을 다지면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테니스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 하는 연습보다 실전을 통한 훈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 한다.
팀에 얽매이다 보면 국제 대회 출전 스케줄을 잡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대학 캠퍼스를 밟고야 싶지만 테니스 인생으로의 성공을 위해 집까지 처분, 해외투어 경비를 마련하겠다는 아버지와 후원금을 지급하며 적극 도와주시고 있는 「윔블던 2000」의 회원들 등 나를 아껴주시는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몸이 부서져라 라켓을 휘두를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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