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아파트 아닌 집'에 살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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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재개발을 위해 도시정비지구 지정을 신청한 서울 성북동 지역 주민들의 소망이다. 해당 지역은 낡았지만 그런대로 살 만한 단독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길의 모습이 정겨운 오래 된 동네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 지역을 고층아파트 단지로 만들겠다고 나섰다. 단독주택은 불편할 뿐 아니라 가격이 오르지도 않고 세를 주어도 싼 값밖에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같은 아파트 선호가 반영된 결과 2005년 기준 서울의 경우 단독주택 8.9%, 다세대.다가구 27.5%, 아파트 60.5%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이미 절반을 훨씬 넘어섰다.

40년이 채 안 된 동안 온 나라의 주거형태가 이처럼 급변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최근 발간돼 베스트셀러 반열에도 올랐던'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마르네 라 발레 대학)교수가 서구인의 눈으로 본 한국 아파트에 대한 보고서다. 이 책에서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주로 "대규모 도시문제"를 일으키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난 2005년 말 프랑스 파리 외곽 신도시에서 일어났던 폭동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서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주로 슬럼화된 사회문제가 집적된 장소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잣대로 서울의 아파트 단지를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특히 줄레조 교수의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다"는 결론은 서울의 다양한 아파트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또 많은 주민들의 주거에 대한 바람을 무시한 이방인의 시각일 뿐이라고 평가절하 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국내에서 많이 팔렸다는 것은 아파트 일색의 주거문화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도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의 건축.도시 전문가들도 아파트로 단일화되는 주거형태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를 나타내 왔다. 한국건축가협회는 올해의 연구 테마를 "아파트 이외의 주거 대안은 없는가"로 정하고 매달 세미나 개최등을 통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도시 젊은 세대의 의식구조가 한옥과 문화주택 등의 주택을 거쳐 아파트에 살게된 과거 세대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를 제기한다. 건축이란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 지고나면 그 인조환경이 우리의 의식 구조를 지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형태의 아파트에서 자란 세대가 붕어빵 형태의 의식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이 같은 시각과는 달리 아파트에 살기를 원하는 국민의 비율이 너무나 많다 보니 주택 시장은 거의 아파트 위주로 움직인다. 거꾸로 이 때문에 아파트 이외의 주택을 원하는 소비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최근 타운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아파트의 편리함과 단독주택의 장점을 함께 갖춘 것으로 선전되는 주택이 건설되고 있지만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또 중산층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정부, 지방자치단체,전문가,민간 건설업자들이 함께 다양한 주거 유형 개발에 앞장 서야 한다. 타운하우스든 단지형 단독주택이든 아파트 이외에 소비자가 좋아할 만한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선보일 수 있도록 각 분야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라나는 세대가 균일한 아파트 단지 이외에도 여러 형태의 주택과 동네에서 살아 봄으로써 다양한 경험을 가지도록 해 주는 것이 건강하고 조화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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