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C 위원|국제 스포츠 주름잡는 "귀족"|세계 어느 곳이나 무 비자 입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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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 인생의 여러 가지 소망 중 실현될 수 있는 한가지만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나는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위원을 택할 것입니다.』
5공화국 때 정치권력과 깊이 관련이 있던 한 체육계 고위 인사는 IOC 위원은 체제·이념을 초월, 양심과 정의를 대변하는 세계최고의 「선량」이라고 표현했다.
세상에는 명예를 상징하는 수많은 자리가 있지만 그 중에도 IOC 위원만큼 화려하고 고귀한 직함도 없을 듯 싶다.
IOC 헌장에 IOC 위원은 상당한 지위, 고결한 품성과 올바른 판단력·실천력을 갖고 있으면서 올림픽 정신에 투철한 인사라야 된다고 못박고 있다.
IOC 위원은 직책상 묘한 일면도 갖고 있다.
IOC 위원은 각기 한 나라의 대표도 아니요, 한 국가 올림픽위원회 (NOC)의 대표도 아니다. 단지 IOC에서 파견한 대사적 성격의 직책으로 그 나라 정부로부터도 자유롭다.
초국가적·초 NOC적인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이래 그 나라의 지위가 높은 인물을 IOC 위원으로 선정한 것이 관례가 되어 점차 귀족집단화 됐다.
현직에 있는 인사들을 보더라도 영국의 앤 공주, 모나코의 앨버트 황태자, 그리스의 콘스탄틴 국왕 등 정상급 인사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IOC 위원에 대해 「무기력한 귀족과 맥빠진 노인들이 신선 놀음하는 자리이며, 현실로부터 완전 유리된 궁정 살롱」이라고 혹평도 한다.
IOC 위원은 세계 어디를 가나 귀빈 대접을 받으며, 비자 없이 모든 국가에 입국이 허용된다.
IOC 위원이 투숙한 호텔에는 그 위원의 국가 국기가 게양되는 것이 관례이며, 어느 나라의 국가 원수와도 면담이 가능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한나라의 국가 원수가 받는 예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서울 올림픽 이전 한국 인사가 공산권 국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을 때에도 IOC 위원만큼은 소련·중국 등 동구권 국가들을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북방외교 등 스포츠 대사로서 한몫을 했다.
IOC 위원의 자리가 명예직으로 더욱 매력적인 것은 사회 활동이 불가능한 75세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위원의 임기는 1894년 IOC 창립과 함께 종신 제였으나 노령화의 폐단을 우려, 지난 85년 6월 베를린 총회에서 정년을 75세로 수정했다.
IOC 위원의 임무는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에 관한 모든 사항을 결정, 수행하는 것이다.
올림픽 공용 언어인 영어·불어 중 최소한 어느 하나에 능통할 것은 필수 조건이며 체육계의 기반은 물론 경제적·사회적 신분, 그리고 경륜·지식을 구비해야 한다. 또 1년의 3분의 1 이상은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체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재 IOC 가입 국가는 1백80개국에 달하고 있으나 IOC 가입국이라해서 IOC 위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는 93명의 IOC 위원이 있으며 이중 15개국은 2명씩의 IOC 위원을 보유, 사실상 78개국만이 IOC 위원을 갖고 있는 셈이다.
2명의 IOC 위원을 두고있는 나라는 올림픽을 두 번 개최했던 미국을 비롯, 영국·프랑스·독일·소련·일본·캐나다·스웨덴·핀란드이며 올림픽을 치르지 않고도 IOC 위원을 2명씩 배정 받고있는 나라는 스위스·브라질·인도·그리스 등 4개국에 달한다.
IOC 위원은 한 국가 한 명인 것이 원칙이나 IOC 헌장은 올림픽 운동이 매우 융성한 국가나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에 대해 2명까지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IOC 위원은 NOC의 추천을 받아 IOC 집행위원회의 심사를 받은 뒤 1년마다 열리는 IOC 총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선임된다.
한국의 IOC 가입에 촉진제가 된 것은 스톡홀름 총회가 개최되기 두달 전 서윤복 선수가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 널리 알려진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의 IOC 위원 탄생은 지난 52년 IOC 위원장으로 피선된 에이버리 브런디지 (미국)와 관계가 깊다.
당시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의 얼굴」로 통했던 이상백씨가 36년 베를린 올림픽부터 깊이 사귀어온 브런디지 위원장의 지원 사격으로 한국 IOC 위원 자리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한국의 IOC 위원은 전임자가 사거 후 바통을 잇는 형태로 초대 이기붕씨부터 현재의 김운용씨까지 6명이 배출됐다. 이상백씨는 초대 IOC 위원으로 이기붕 국회의장을 추천했다.
이씨가 이기붕 의장을 정부의 지시 아래 추천하자 브런디지 위원장은 『왜 당신이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국내 스포츠 활동이 적었던 55년 IOC 위원으로 선임된 이기붕씨는 국내 정치의 실력자로서 IOC 위원으로 활동할 여력이 없었다.
한국의 IOC 가입의 막후 교섭자인 이상백씨는 이기붕씨가 60년 4·19 혁명 때 사망한 후 4년만인 64년 IOC 총회에서 단 한명의 반대도 없이 제2대 IOC 위원으로 선출됐다.
한국 사회학의 태두이자 일제 시대부터 농구 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 위원은 2년 후인 66년 5월 심근경색으로 급서, 아쉬움을 남겼다.
66년부터 77년 작고 때까지 10년간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한국 체육의 위상을 격상시켰던 장기영 씨는 정열적으로 활동, 국제 무대에서 「코리안 타이거」란 별명이 따라 붙었다.
71년부터 9년여간 대한체육회장을 역임, 한국 체육의 토대를 닦았던 김택수씨는 77년 IOC 위원이 됐으나 79년 정계로 복귀하면서 스포츠 외교에는 소홀했다는 평을 받았다.
84년 IOC 위원이 된 박종규씨는 국내 체육 발전에는 공이 컸으나 17개월의 단명으로 끝나 국제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의 IOC 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운용씨는 지금까지의 역대 한국 IOC 위원과는 달리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제 스포츠계의 거물로 꼽히고 있다.
IOC의 「내각」 에 해당하는 집행위원으로 피선된 것은 국내 IOC 인사 중 김 위원이 처음이며 국제 경기 연맹 총 연합회 (GAISF) 회장 IOC TV 분과위원장 등 국제스포츠 무대에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 다음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의 IOC 위원은 사실상 통치자의 「낙점」으로 선임되었던 것이 관례가 되어왔다.
한국 정부의 로비 탓도 있었지만 IOC측에서는 대한 올림픽위원회 (KOC)가 추천한 인사에 대해 「별 저항 없이」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 같은 배경은 당시 IOC가 한국의 스포츠 인사를 전혀 알지 못해 정부의 의견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러한 관행이 바뀌기 시작, 김운용 씨의 선임과 관련해선 IOC와 한국 정부간에 다소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한국 고위층의 낙점에 의하지 않고 IOC 위원이 선임된 경우는 김 위원이 처음으로 IOC 위원 선출도 민주화 바람을 탄 것이다.
김운용의 IOC 위원 선임과 관련한 에피소드 한 토막.
85년 박종규 위원이 서거하자 한국정부는 그 해 12월 바레인에 공무로 나가있던 다시 이영호 체육부장관을 IOC 본부로 보내 사마란치 위원장과 한국 IOC 위원 선임 문제를 처리토록 했다.
이 장관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의중에 있던 인사를 추천했으나 사마란치 위원장은 『IOC 위원의 선임 문제는 IOC 고유의 일로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NONE OF YOUR BUSINESS)』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김운용씨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86년2월 김종하 KOC 위원장을 보내 재차 한국 정부의 「뜻」을 전달했으나 사마란치 위원장은 『체육에 밝고 공로가 있는 인물을 추천하라』면서 『정치적으로 하면 안 된다. IOC 위원 없이 서울 올림픽을 치러보겠느냐』며 엄포성 경고를 놓고 김 위원장을 되돌려보냈다.
궁지에 몰린 한국 정부는 당시 노태우 서울 올림픽 대회 조직위원장의 의견을 물어 김씨를 IOC 위원으로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이제 우리 나라는 또 한명의 IOC 위원 추가 배정 문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는 93년9월, 몽테카를로 IOC 총회를 끝으로 임기가 마감되는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2명의 IOC 위원 임명권이 부여되고 있는데 한 명은 이탈리아의 프리모네비올로 (국제 육상 연맹 회장)를 임명했고 또 한명은 공석으로 남아 있다.
그 한 명도 사마란치가 결정하고 물러날 것으로 보여 국내 체육계 인사들은 우리 쪽에 한 명이 배정되지 않을까 관심을 쏟고 있다. <방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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