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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6시간 일하는 90세 현역 "내 작품엔 한국 정서 배어 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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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 무대의상의 대모 윌라 김이 ‘더 뮤지컬 어워즈’의 출발을 축하하며 “새로운 도전이 큰 성공을 거두길 바랍니다. 시상식에 참여해 수상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예가 될 것입니다”란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꼿꼿했다. 검정 바지 정장에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매무새는 세련되고 품위가 있었다. 말도 논리적이며 간결했다. '이 할머니가 정말 아흔 살 맞아?'란 생각에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라고 묻자 슬쩍 눈을 흘겼다. "여성에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죠."

윌라 김(한국명 김월나). 토니상.에미상 각각 2회 수상 등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 의상의 대모. 그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한국계로는 최초로 미국 '무대예술 명예의 전당'에 올 1월 헌액된 것. 뉴욕 맨해튼 동부에 위치한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집안 곳곳엔 그가 직접 만든 의상과 소품이 가득했다. '라이언 킹' 연출가 줄리 테이머, 역대 최고의 댄서이자 안무가로 꼽히는 토미 튠 등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눈에 들어왔다.

그는 1910년 미국으로 이민갔던 김순권.김노라씨의 4남2녀 중 장녀로 LA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돈도 안 되는 무슨 예술이냐"며 반대했지만 어린 윌라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선 "책을 내달라"고 떼를 쓸 만큼 당돌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처음엔 파라마운트 영화사에서 일했다. "너무 공장처럼 일을 해 창의성이 없었다"고 한다. 결혼(남편은 프랑스계 미국인 작가인 윌리엄 펀 뒤부아, 93년 작고)과 학업의 기간을 거친 뒤 그는 61년 오프-브로드웨이 작품 '사랑의 붉은 눈'으로 공연계에 데뷔했다.

그를 본격적으로 알린 건 이듬해 작업한 발레극 '슬픔의 연인들'. 동양적 신비감이 물씬 풍기는 의상으로 "옷 하나만으로도 작품의 컨셉트를 확인시켜 준다" "프로그램에 윌라 김의 이름이 있다면 그 작품은 기대해도 좋다" 등의 호평이 쏟아졌다.

"지금껏 한국에 딱 두 번 갔습니다. 한국인이라기보다 뉴요커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죠. 하지만 제 의상엔 늘 동양적 색채가 있다고들 합니다. 태생적으로 한국 정서가 배어 있는 거겠죠."

그는 여섯 번이나 토니상 후보에 올랐고 81년과 93년 두 차례 수상했다. '송 앤드 댄스' '댄싱' 등 전설처럼 내려오는 뮤지컬도 그의 손을 거쳤다. 한국에서 인기 높은 '그리스'의 번쩍이는 의상 역시 그의 작품이다. 뮤지컬.발레.연극.영화.TV 등 전방위 활동을 펼치며 지금껏 250여 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는 한국의 '더 뮤지컬 어워즈(The Musical Awards)'의 탄생도 반겼다. "배우뿐 아니라 스테이지 뒤편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제대로 평가해 주길 바랍니다."

<관계기사 16면, c섹션 1~8면>

그가 더욱 위대한 건 '현재진행형'이라는 데 있다. 그는 요즘도 6월 공연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하루 16시간가량 매달리고 있다.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치매도 안 걸리는 거겠죠. 은퇴요? 아마 제가 죽는 날이 될 겁니다."

뉴욕=글.사진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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