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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비호세력 있었다”/백범 비서가 재구성한 암살현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총성나자 군인들이 먼저 도착/안 체포하던 경찰에 “비켜라”/헌병들,필동사령부로 압송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씨(75)는 『백범이 나를 무시하고 폭언을 퍼부었기 때문에 감정이 격화돼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안씨의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경교장 현장에 있었던 백범의 비서 선우진씨(71·재미)와의 국제전화를 통해 암살현장을 재구성해 본다.
◇현장도착=안씨가 백범의 거처인 경교장(현 서울 평동 고려병원 본관)에 도착한 것은 49년 6월26일 낮 12시 조금 전.
일요일인 이날 백범은 누군가가 자신의 뷰익승용차를 타고 나가는 바람에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서울 남대문교회(서울역 맞은편의 대우빌딩자리에 위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자신이 설립한 창암학교(창암은 백범의 아명)의 여교사를 불러 2층 거실에서 학교운영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현역 육군포병 소위 신분으로 3개월전 백범의 한독당에 입당했던 안씨는 정복차림에 권총을 허리에 찬채 1층 대기실에서 창암학교 여교사의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백범의 비서 이국태·이풍식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대광고 교감이었던 박동엽씨(86)가 현관문을 들어섰으며 곧이어 낮 12시가 막 지난뒤 백범을 따르던 강홍모 대위도 인사차 들렀다.
낮 12시25분쯤 창암학교 여교사가 이야기를 끝내고 2층에서 내려왔으며 먼저와서 기다리던 안씨가 강대위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강대위가 인사를 마치고 내려온뒤 안이 비서 선우씨의 안내로 2층 거실에서 백범을 만난 것은 낮 12시30분쯤이었다.
한독당조직부장 김학규의 소개로 입당한 후 세번째의 만남이었다.
백범은 한 손에 부채를 든채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으며 라디오에서는 「역마차는 달린다」라는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범행=선우씨가 식당 아주머니에게 점심 메뉴인 만두국이 준비됐는지 물어 보는 순간 갑자기 1층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뛰어 올라가보니 안씨가 모자·계급장을 내던지고 실탄이 여덟발이나 남은 45구경 권총을 손에 든채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가 김구 선생을 쏘았소』라고 말했다.
안씨가 2m거리에서 백범의 머리에 두발,앞가슴과 배에 각 한발씩 모두 4발의 총탄을 쏜것이었다.
『안씨는 백범과 20여분동안 남북협상,국회프락치사건 등에 대해 격론을 벌이다 백범이 폭언을 하며 화를 내자 감정이 격화돼 돌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주장하지만 그 시간은 불과 2∼3분사이여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우씨는 또 설령 시간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백범 선생이 겨우 세번째 만나는 육군소위 신분의 안씨와 깊이 있는 대화를 할리가 만무했다고 설명했다.
4·19이후 백범 암살진상규명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김용희씨(73)는 『안씨는 백범에게 인사를 드리는 체하다 「선생님」하고 부르니 백범이 쳐다보는 순간 그대로 총을 쏘았다고 자백했다』고 밝혔다.
흉탄을 맞은 백범 선생은 유혈이 낭자한채 2층 거실 탁자에 엎드려 숨을 거두고 있었다.
경교장 경비실의 경찰관이 이 사실을 서대문경찰서에 보고했으며 이국태 비서는 급히 적십자병원으로 의사를 불렀다.
이국태·이풍식 비서 등은 계단을 내려온 안씨를 의자를 부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마구 때렸다.
◇연행=총성이 난뒤 5분도 채 안돼 군인작업복 차림의 낯선 사람 4∼5명이 경교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들은 때리는 비서들을 말리고 안씨를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신고를 받은 서대문경찰서 형사주임 강용주 경위가 나타나 안씨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헌병대 스리쿼터트럭 한대가 경교장 본관에 도착했다. 헌병 사령부 인사과장 김병삼씨등 검은 안경을 쓴 군인 3명이 응접실로 뛰어들어 『군인을 왜 때려. 경찰나부랑이는 저리 비켜. 범인은 군인이니까 우리가 데려가겠다』며 안씨를 낚아채 타고온 스리쿼터트럭에 태우고 남산 필동 헌병사령부로 호송해 갔다.
선우씨는 『지척거리인 서대문경찰서,필동에 있는 헌병대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이보다 앞서 정체불명의 군인작업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경교장에 나타났었다는 것은 분명히 안씨가 제3세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밝히고 있다.<한경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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