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암살배후 규명 계기로 본 극우테러의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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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좌우대립시기 요인암살 의혹 밝혀야/이승만 총애 받은 일군 헌병출신 김창룡/「반이」 주장 정적은 “빨갱이”로 몰아 숙청/몽양·운산 등 저격범 잡고도 배후미궁에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씨(76)가 43년만에 암살배후를 밝힌 것을 계기로 해방이후 좌우대립등 근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발생한 여운형·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등 진상을 밝히는 노력이 재개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안씨가 13일 백범의 암살배후에는 당시 육본정보국 방첩대장이던 김창룡과 미 정보기관인 OSS가 연관됐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그동안 백범 암살사건을 두고 무성했던 「배후설」이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안씨는 백범암살후 무기를 선고받았다 별다른 이유없이 15년으로 감형되고 곧이어 6·25가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3년만에 대령까지 진급해 예편함에 따라 사건발생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배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만 끊임없이 있어왔다.
안씨가 백범암살을 사주했다고 밝힌 김창룡은 해방이후 자신이 암살당하는 56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엄청난 권력을 행사해온 인물. 함남 영흥태생으로 일본 관동군헌병대 오장(하사)출신인 김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친일행각이 들통나 소련군에 붙잡혀 사형장으로 이송되던중 열차창문을 깨고 탈출,월남했다.
이때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김은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출발,1947년 육사3기생으로 입교한뒤 관동군시절의 정보활동 경력을 인정받아 정보부대창설의 실무 책임을 맡는다. 김은 군내부의 좌익세력 숙군운동을 주도하고 「인민해방군사건」「동해안반란사건」 등을 해결하면서 이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기 시작했고 49년 방첩대(SIS)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자신의 정적들을 마구잡이로 숙청하는등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다 결국 56년 1월 허태영 대령등이 보낸 저격수에 의해 36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편 안두희씨가 백범암살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밝힌 OSS는 2차대전당시 독일·일본 등 교전상대국의 주민들을 상대로 광범한 「공작」을 전개한 정보기관으로 47년 창설된 CIA의 전신.
◇몽양 여운형사건=3·1운동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해방후에 극좌·극우의 극심한 대립양상이던 국내 정국에서 좌우합작으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꾀하면서 분단을 막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려 노력하다 47년 7월19일 혜화동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경찰은 몽양이 암살당한지 5일만에 저격범 한지근을 검거했으나 한은 자신의 단독범행임을 주장,배후등이 의문으로 남아있다. 몽양암살 27년뒤인 74년 2월 김흥성씨(가명)등 4명은 한을 비롯한 5명이 함께 공동모의해 몽양을 암살했으며 다른 배후는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당시 사건진상 폭로경위에 대해 「역사가 너무 왜곡돼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한지근의 단독범행결론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고 주장,아직도 확실한 배후세력을 캐내지 못하고 있다.
◇운산 장덕수사건=해방직후 우익세력의 최대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으로 있다 47년 12월2일 암살된 운산 장덕수의 경우도 범인의 암살동기·배후 등이 아직까지 미궁으로 남아있는 상태.
암살범이었던 종로경찰서소속 순경 박광옥은 이날 저녁 정복을 입고 운산의 제기동 자택을 방문,가르침을 받고싶다며 면담을 요청해 마주 앉자마자 총을 발사하고 달아났으며 이틀후 붙잡혔다.
학계에서는 안시의 이번 증언으로 그동안 비공식적으로만 논의돼 왔던 백범 암살배후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을 계기로 아직 그 배후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여운형·장덕수 등의 암살사건도 재조명돼야 한다는 소리가 높게 일고있다.<정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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