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열정 앞엔 장애 없어 꼭 방송인으로 뜰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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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장애인 미디어센터 ‘바투’ 녹음실에서 학생들이 방송인의 꿈을 키우고 있다. 왼쪽부터 오교분.안성빈.안희정.하석미씨.최승식 기자

"마음속에 희망 없이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자, 다시 한번 내 안의 희망을 끌어내 읽어보세요."

17일 오후 영등포구 여의도동 장애인 미디어센터 '바투'의 강의실. 강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교실 가득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나만의 야망 노트를 만들라'는 글을 읽는 학생들의 목소리에도 점점 힘이 실린다. 방송용 표현법을 배우는 이 수업의 학생은 15명. 이 중 네 명이 지체 장애를 가졌다. 아나운서 출신 이예진 사무국장이 표현법.대화법.발성법.자신감 키우기 등을 가르치며 이들의 '끼'를 끌어내고 있다.

휠체어를 탄 안성빈(34)씨는 방송 진행자를 꿈꾸는 '예비 방송인'이다. 8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한 후 경수종양이라는 병을 앓으면서 사지가 마비됐다. 지체 장애 1급 판정을 받고 6년 동안은 숨은 듯 집에만 있었다. 2005년 가스펠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며 활기를 되찾은 안씨의 다음 목표는 라디오 진행이다. 안씨는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라디오는 정말 친구 같은 존재였죠. 모두가 깔깔 웃을 수 있는 즐거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연기자와 연출자를 꿈꾸는 하석미(31)씨와 안희정(34)씨는 중학교 선후배 사이다. 언니 안씨는 최근 지역방송국인 마포FM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채널의 한 코너를 맡아 어엿한 PD가 됐다. 지체 장애에 언어 장애까지 가진 안씨는 지난해 우연히 방송아카데미 수업을 듣기 전까지 "방송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한다. 작가를 꿈꾸던 안씨는 방송을 배우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안씨는 "말로도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제작자가 꿈이지만 한 단계 한 단계 노력해 아나운서 과정까지 도전해볼 거예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목소리가 남다르게 고운 후배 하씨는 모델.MC.성우 등의 경력을 가진 팔방미인이다. 2005년 장애인 연극제에서는 배우로 발탁돼 무대에 서기도 했다. "다른 이의 삶을 연기하는 게 너무 즐겁다"는 하씨는 "연기를 가르쳐 주긴 해도 휠체어 탄 장애인을 고용해주는 데가 없어 항상 아쉬웠다"고 말한다. 하씨의 목표는 후배들을 위해 '장애인 배우 1호'가 되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연기학원에 다니고 발성 연습도 하느라 하루 하루가 바쁘다. 훗날 후배 양성 기관을 운영하기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도 하고 있다.

오교분(32)씨는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직접 만든 만화 캐릭터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히면서 성우의 꿈을 키우게 됐다. 성대모사.모창 등 끼가 넘치는 오씨는 이 수업을 들으며 아나운서의 꿈도 보태게 됐다. 오씨는 "자신감이 생기니 세상이 넓어 보인다"며 "방송은 내가 제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 국장은 "장애인 학생들은 몸이 불편할 뿐 방송을 향한 열정과 잠재력은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며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과 무대"라고 말했다.

김은하 기자 <insight@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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