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잡이 규제 풀릴 날만 기다리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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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백여 년간 한국 유일의 고래잡이 항으로 이름이 높았던 장생포의 옛 모습을 다시 보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한국 최대의 포경어업단지로 명성을 날리던 장생포에서 40년이 넘도록 고래와 인연을 맺어온 양원승씨(70).
그는 국제포경위원회(IWC)가 자원보호를 이유로 86년 상업포경을 금지시키고 한국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이후 포경선을 정박시켜 놓은 채 배가 비바람에 녹슬어 몰골이 흉하게된 지금도 고래잡이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고래고기와 술을 곁들여 파는「왕고래 집」의 주인으로 고래와의 질긴 인연을 끊지 않고 있는 그는 조만간 풀릴지도 모를 규제에 대비,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부산에서 철공업을 하던 그가 28세 때인 지난 50년 형과 함께 고래잡이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 일본 포경업자들이 물러가면서 장생포에서 울릉도에 이르는 동해바다에 고래가 넘쳐나자 한국정부가 포경사업을 적극 권장했기 때문이다.
철공 기술자였던 덕분에 수압에 별 상관없이 수중에서도 고래에 작살을 잘 명중시키는 포경포를 개발해 포경업자들의 리더가 되기도 했던 그는 한때 12명의 어부를 이끌고 매월 길이 20m에 무게가 20t이나되는 긴 수염고래를 20∼30마리씩 잡았고 9m미만의 밍크고래는 수도 없이 잡아들이곤 했다.
한창 성황을 이루던 70년대 말부터 80년도 초기까지 장생포에서는 30여 개의 포경전문업체가 생겨나 월 1천여 마리의 고래가 거래됐다.
포획량의 대부분이 외부에 비누·화장품·기름 원료로 팔려나가고 고래고기 음식점도 성시를 이뤄 1백여 곳이나 생겼다.
장생포에 거주하는 1천5백여 주민들도 포경사업에 동원돼 가계가 기름졌던 시절이었다.
고래와의 길고 긴 격전 끝에 집 더미 만한 고래가 어부들의 손에 끌려올 때 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에 휩싸이곤 했다고 양씨는 회상했다.
그러나 포경사업이 금지된 이후 이 마을은 병든 사람처럼 시들어가기 시작했고 어부들은 하나둘 생계를 위해 도시의 노동자가 돼 장생포를 빠져나갔다.
포경중개업자를 거쳐 현재는 지방특산물로 지정된 고래고기의 음식점을 운영하는 그는 어부들의 일반그물에 걸린 작은 밍크고래들을 구입해 육회·수육 등으로 팔고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장생포 부둣가에서 뻘건 녹이 슨 채 양씨의 손길을 기다리는 포경선에 하루 빨리 옛날의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일이다.
장생포에는 현재 몇몇 선주들이 고래에 대한미련을 버리지 못해 6척의 포경선이 출항 대기중이며 1백여 명의 선장·갑판원들이 조업재개를 기다리고 있다.
원래는 5년을 규제기간으로 잡아 이미 작년으로 그 기한이 넘었으나 당국이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고 그는 안타까워했다.<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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