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대 스트레스 … 고립감 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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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 작가인 수키 킴이 자전적 소설 '통역사'에서 제시한 이민 1.5세대의 사회 부적응 사례의 하나다.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23.영문과 4학년)씨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이민 간 1.5세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조씨는 철저한 고립생활을 해오면서 숙소에 불을 지르거나 일부 여성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스토킹 등 비정상적인 생활을 해왔다. 그가 남긴 메모에는 '방탕' '기만적인 허풍쟁이들'과 같은 사회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엿볼 수 있는 단어가 가득했다. 영문과 학생을 비롯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조씨가 미국 사회에서 정신적.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외감만 키우다 결국 불만이 터져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민 1.5세대가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이민 1세대나 현지에서 태어나 자란 2세대와는 달리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낀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경험자들은 "자아가 확고히 형성되기 전인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해외로 이민이나 유학을 갔을 때 가장 큰 고충은 언어.문화 차이와 이에 따른 사회 부적응"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문회와 학생회의 고리로 연결된 한국 유학생들과도 어울리지 못해 고립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참사가 벌어진 버지니아공대에서 조씨를 아는 한국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대학 당국이 그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대학에는 한국계 학생 수가 1000명이 넘지만 1.5세대 학생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주미 대사관의 한 직원은 "한국인 유학생 사회가 커지면서 국내에서 건너간 유학생과 1.5세대 교포 학생, 시민권을 취득한 학생들 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며 "1.5세대 학생들에겐 이런 상황도 고민거리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1.5세대는 초.중등학교를 한국에서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고등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다. 현지 교포들은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미국생활에 적응해야 하기에 정신적 갈등이나 가치관의 혼란에 적지 않게 시달린다"고 전한다.

워싱턴 한미포럼의 박해찬 변호사는 1.5세대의 또 다른 문제로 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을 꼽았다. 한국 이민자들의 독특한 문화가 자녀를 문제아로 내몰기 십상이란 것이다. 조씨의 부모처럼 세탁소 등 힘든 일을 하며 오로지 자녀의 성공만 바라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줘 결국 대형 폭력 사건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조씨 사건을 계기로 1.5세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며 "문화 단절로 인해 잃어버린 경험과 시간을 배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번 조씨 총격사건을 1.5세대의 사회 부적응과 연결하는 시각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현지의 한 교민은 "이번 사건을 1.5세대 자녀의 부적응 사례로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영달 서울대 사범대 학장은 "조씨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도미했다면 미국에서 자아 형성과 사회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봐야 한다. 가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해 규범과 행동 사이의 괴리를 낳았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조씨의 범행 배경을 조기 이민이나 유학 문제와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다만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지만 여전히 백인 위주인 미국 사회에서 조씨가 열등감을 느꼈을 수 있고, 그것이 백인에 대한 증오로 연결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했다.

유권하.이여영 기자

◆ 이민 1.5 세대=부모를 따라 유년이나 청소년 시절에 이민을 가서 현지에서 자란 사람을 말한다. 성인이 돼 이민 간 사람은 1세대, 현지에서 태어난 사람은 2세대라고 불린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간의 충돌사태가 벌어진 뒤 학계에서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처음 나온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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