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웃기고 울리느니 고독한 "지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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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야구의 심판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비유된다.
그들은 경기의 주역은 아니지만 주재자로서 지휘봉하나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와 흡사한 것이다. 반면에 패한 감독과 선수는 물론 응원단들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 쓰고 온갖 야유와 욕설을 듣는 동네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야구심판들 사이에는 아이로니컬 하게도『선수나 관중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심판이 명-심판』이라는 좌우명이 있다.
물 흐르듯 경기를 이끌어나가면 심판은 전혀 관중들이나 선수·감독들에게 회구될 이유가 없지만 한번이라도 판정에 물의가 있게되면 불리한 쪽의 덕아웃이나 관중 쪽의 비난을 면키 어렵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판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전혀 이름이 거론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독과 선수, 그리고 관중들은 자기 쪽에 불리한 판정에는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경기흐름 좌지우지>
지난 30년대 미 프로야구의 심판으로 활약한 샘 크로퍼드는 일찍이 심판은 고독한 직업이며 환영받지 못하는 직업』이라고 설파했다.
스탠드의 관중, 양쪽 덕아웃에 있는 선수·감독들은 모두 심판의 오심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심판의 적(?)이라는 것이다.
이같이 끊임없는 감시의 눈초리를 받고는 있으나 심판은 경기장에서 무소 불위의 권한을 지닌다.
다른 경기와는 달리 공이한번 움직일 때마다 판정이 따르는 야구에서는 심판이경기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비중이 다른 종목보다 엄청나게 크다.
이에 따라 권한의 남용을 막기 위해 감시의 눈초리를 빛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지난 83년 대전구장에서 심판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발생한 금성한의 만루홈런 시비는 유명한 일화. OB와 해태의 경기에서 금이 왼쪽 펜스로 홈런·파울을 구분할 수 없는 볼을 넘겼으나 3루심 이일복씨는 볼을 쫓지 못했다.
이씨는 관중들의 함성을 듣고 홈런으로 단정,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홈런 신호를 했다. 그러자 OB 김영덕 감독이 덕아웃에서 튀어나와 항의, 상황을 지켜본 김옥경 주심은 파울로 판정을 바로잡았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해태 김응룡 감독이 뒤질세라 거칠게 항의했으나 더 이상 판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김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심판 실로 달려가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화풀이했으나 출장정지의 징계를 감수해야 했다. 또 심판도 인간이어서 경기 중 간혹 이성보다 감정에 흔들리는 경우도 흔하다.
김광철 주심은 지난 85년 선동렬과 최동원의 첫 대결에서 주심을 보았다.
그날 경기는 15회 연장 끝에 무승부로 끝났지만 9회 말 롯데의 1사 1, 2루 찬스 때 선동렬의 보크를 잡아내 경기가 그대로 끝날 뻔했다 김씨는 보크를 잡는 순간「이 같은 멋진 대결을 보크로 마쳐도 될 것인가」무척 고민했다고 한다.
팽팽한 접전에서 심판들은 끊임없이 갈등에 빠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판마다 판정 기준이 같을 수가 없어 분쟁의 소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심판의 자질이나 경기운영 능력이 아마수준에 머물러 경기마다 감독의 어필이나 야유가 난무하곤 했다.

<5-6회 되면 피로>
83년 삼미에서 시즌 최다 승(30승)을 기록한 재일 동포 장명부 투수는 유독 잦은 어필로 심판들을 괴롭혔었다.
장씨는 이 같은 코스의 공을 던져도 공 하나 하나마다 주심의 판정이 달랐다. 이래서는 투수의 코너웍도, 타자의 선구안도 나아질 수 없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자주 항의했었다』며 당시를 술회하고 있다. 보통 한 경기에 양 팀의 투수가 던지는 공은 3백 개 정도에 이른다.
따라서 주심은 3백 번 스트라이크나 볼을 판정해야한다. 이런 상황이니 투수나 타자들은 불리한 판정일 경우 불만을 품게 마련이다.
프로야구 10년 동안 심판을 맡아온 베테랑 오광소씨는 주심의 고충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경기가 5, 6회 정도 진행되면 온몸이 쑤시고 눈앞이 흐려진다. 체력이 가장 떨어지는 시점이다. 이 때쯤이면 심판의 자세도 흐트러진다. 이를 악물고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몸과 마음이 가라앉아 자연치 볼을 보는 각도가 틀려지고 스트라이크존에 다소 오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구규약에는 스트라이크나 볼에 대한 판정은 어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아 놓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야구선진국에서는 TV와 중계계약을 할 때 아웃이냐 세이프냐를 판정하는 장면의 슬로비디오를 하지 않기로 약정을 맺기도 한다. 그런데도 가끔 야구규약을 망각한 어필이 흔히 발생하곤 한다.
이에 대해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인 김광철씨는『대부분선수들이 어필을 할 경우는 자신의 선구안에 대한 취약점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서『스타급 선수일수록 스트라이크나 볼 판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독들의 경우는 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볼 판정에 대한 어필이 금지된 야구규약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사소한 판정시비는 심판의 비위를 긁어 팀 승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잘 덕아웃을 튀어나온다.
뭔가 잘 안 풀리는 경기, 선수들이 왠지 파이팅이 없어 보일 때 감독들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치밀한 계산 하에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다.
이 같은 쇼(?)의 명수는 전 LG감독이던 김동엽씨다.
김 감독은 경기가 안 풀릴 때면 뛰어나와 엉뚱한 소리로 심판들을 괴롭힌다.
『어이, 김 심판. 나 어제 과음해서 머리가 아픈데 한 3분간만 떠들다 들어갈 테니 좀 봐 주라』는 등 경기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애교(?)있는 얘기로 시간을 끌곤 했다.

<김동엽씨 일화 많아>
스탠드의 관중들은 김 감독이 대단한 시비를 벌이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고 심판들은 관중들의 야유에 가슴만 태울 뿐이다.
아마시절 심판을 맡기도 했던 김 감독은 심판들과의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김 감독은 아마시절심판으로 활약할 때 지금도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김 감독은 지난 66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심판으로 출장, 한국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일본·필리핀·자유중국·호주 등 5개국이 참가,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는 당시로서는 가장 인기 있고 비중이 있는 대회여서 한국으로서는 당연히 우승을 목표로 했다.
1, 2차 리그로 나뉘어 각 리그 우승팀이 최종 승부를 가리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1차 리그를 전패해 우승은커녕 최하위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언론과 팬들은 연일 한국의 코칭스태프(김영조 감독·김영덕 코치)를 질타했고 곤경에 빠진 협회는 파산직전이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대한야구협회는 심판들에게『한국팀을 무조건 우승시켜야 한다』고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한국팀의 우승을 위한 총대는 김동엽씨가 메기로 했다.
마침 한국의 라이벌인 일본은 4전승을 거두는 등 우승은 떼어 논 당상이라며 기고만장했다.
2차 리그에 일본 팀 전담주심이 된 김동엽씨는 아예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는 스트라이크를 볼로, 세이프를 아웃으로 판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의 애국적(?) 판정에 일본선수들은 울화가 치밀었고 예상대로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당시 일본의 4번 타자인 거포 사사키(좌좌목)는 머리위로 날아오는 볼을 휘두른 후 김 감독을 쳐다보며『고레모 스트라이크 데스카』라고 빈정거릴 정도였다.
한국팀은 김동엽 심판의 맹활약(?) 덕에 마침내 최종일 일본을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자질 시비 줄어>
프로야구는 10년의 연륜이 쌓이면서 심판들의 자질도 많이 향상됐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아직도 심판의 자질에 대한 팬들의 의구심은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송진우의 노히트노런 기록을 고대하던 대전 팬들이 경기에 패한 후 심판들이 투숙한 호텔로 쳐들어가 편파판정이었다고 항의한 일도 원인은 어처구니없는「특정 팀을 지나치게 봐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들은 오늘도 천직인 심판에 자부심을 느끼며 짐을 꾸린다.
특급심판인 이규석씨(45)는『프로 초창기에는 나이도 젊어 재미가 있었으나 이제는 몹시 체력부담을 느끼는 데다 경기장 따라 이동하는 것도 피곤해 갈수록 벅차다』며『가정생활은 거의 돌보지 못하는 게 심판들』이라고 토로하고 있다.<권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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