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터뷰] 한승헌 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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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불우이웃이 너무나 많다. 얼마 전 어머니 시신과 6개월 동안 생활한 나이 어린 중학생의 경우에서 보듯 국가차원의 사회복지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모두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부에 참여할 때 곤경에 처한 우리의 이웃은 웃음을 찾게 된다. 지난 10일 기부문화 정착과 민간 복지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는 한승헌(韓勝憲)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만났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사랑의 체감 온도탑'이 서 있습니다. 올해의 성금기온, 기부기온은 몇 도나 될 것 같습니까?

"연말연시 모금 목표액을 9백21억원으로 잡았습니다. 눈금이 1백도까지 있으니 9억2천1백만원이 모일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갑니다. 경기침체와 대선 불법 정치자금 수사와 관련한 기업활동 위축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훨씬 초과할 것으로 믿습니다. 대체로 이 시점의 모금이 연간 모금액의 65~70%를 차지합니다. 기부를 받는 입장에선 연말이 정말 금쪽같은 시간입니다."

-점차 기부문화가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입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기부문화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역사는 아직 일천하지만 놀라운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모금실적을 보면 성장곡선이 상당히 가파릅니다. 1999년 2백14억원, 2000년 5백10억원, 지난해에는 1천6백14억원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부문화의 뿌리가 깊은 미국의 경우 2000년 통계를 보면 전 가구의 86%가 기부에 참여했고 가계소득의 3.1%를 기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전체 기부금액의 80% 이상이 개인 기부입니다. 기업이 10여%를 차지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기업 의존도가 대단히 높습니다. 약 70%가 기업 모금이고 나머지가 개인 및 기타 부문의 모금입니다. 올바른 기부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소액일 망정 반복적인 개인 기부가 늘어야 합니다. 2001년 우리나라 전 가구의 52.3%가 기부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종교단체의 기부를 제외한 수치입니다. 가구당 연간 기부액은 10만6천원으로 가계소득의 0.35%를 기부했습니다. 미국에 비하면 대단히 적지만 기부 자원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매우 고무적입니다."

-전반적으로 기부는 점차 늘지만 불우이웃은 줄지 않고 있습니다. 생계형 가족 집단자살과 범죄가 증가 추세입니다.

"모금액의 증가만큼이나 복지를 필요로 하는 대상과 범위는 더욱 가파르게 늘고 있습니다. 또 요구되는 복지 서비스 수준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저생계보장은 정부가 책임지는데, 그보다 조금 더 소득이 많은 차상위 계층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습니다. 이들에게 가구당 월 60만원씩 6개월 동안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복지부의 지원을 못 받는 미신고 시설을 지원해 신고시설 기준에 맞게 개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재민이나 쪽방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지원하기보다는 시설이나 단체를 대상으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기부와는 담을 쌓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일부 부유층은 과시적 소비나 잦은 해외유람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갖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능력껏 벌어서 맘대로 쓰는 건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부(富)를 통해 누리는 이기적인 행태에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다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사회적인 부와 권력은 동시에 남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힘에는 의무와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나 교육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데서 오는 보람, 재물을 통해 진정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향락풍조가 생깁니다. 돈자랑, 돈잔치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울 정도로 낮은 도덕적 수준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좀더 건강해져서, 어려운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을 바탕으로 뭔가를 기부하면서 자기 것도 즐겁게 쓴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의 힘있는 계층, 지식으로나 권력으로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다 높은 도덕성을 실천할 때 부의 참다운 가치가 빛을 내고, 우리 공동체의 유대감도 높아져 살 만한 세상이 될 겁니다. 지나친 향락에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부의 축적이 과연 정당했나 묻고 싶습니다. 부자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들을 딱하게 여기고 나눔의 실천을 보여준다는 건 정말 눈물겨운 일입니다. 기업의 기부금액이 전체의 70%를 차지하지만 이것은 기업의 모금이지 기업가 개인의 모금이 아니라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미국이 개인모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기업가 자신이 받은 배당금을 기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업은 기부를 많이 하지만 기업가는 기부를 안 하는 나라입니다. 소득이 많은 기업가들이 개인 차원의 기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일부 기업인의 경우 주주들의 입장을 고려해 기부를 망설이거나 액수를 높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주나 사외이사들이 복지기금으로 내는 기부에 대해 좀더 너그럽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일생 동안 어렵게 모은 전재산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거나 학교에 기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유산 남기지 않기'에 앞장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재벌급의 부자들이나 대기업도 장학재단이나 문화재단을 통해 사회공헌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담으로서 기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부를 축적해 그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쾌척하는 경우입니다. 모은 돈이 아까워서 당대에 쓰지도 못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색할 정도로 절약한 전재산을 아낌없이 쾌척하는 마음에는 무엇이 작용하는 걸까요. '재물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게 사람이다'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대학(大學)에 '덕자본야(德者本也)요, 재자말야(財者末也)니, 외본내말(外本內末)이면 쟁민시탈(爭民施奪)이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끝이니 밖으로 돌려야 할 것을 근본으로 삼고 안으로 모셔야 할 것을 끝으로 돌리면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빼앗는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귀함을 재물보다 더 높이 사고 이를 깨달았기에 돈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부 미담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또 다른 기부, 또 다른 사랑을 베풀게 하는 촉매가 됩니다. 부를 상속해 자손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주고 싶은 것도 사람의 욕심이지만, 미담의 주인공들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보람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겁니다. 우리나라 부자들은 조세면탈 등 변칙적 상속을 하는데, 미국의 경우 오히려 부자들이 상속세 문제나 기부에 따른 세제 혜택에 나서서 반대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우리와 다른 자본주의 윤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만 있고 자본주의 윤리는 못배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선진국보다 기부문화의 수준이 뒤떨어져 있는 것이 법과 제도적 제약 때문은 아닌지요?

"우리나라에는 기부금품모집금지법이 있습니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모금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과거에 기부가 자발적 재물 출연이 아니라 준조세적 또는 반공갈적 강요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한 것입니다. 이제는 기부 활성화를 위해 기부금품 모집 규제는 좀더 완화하고, 세제 지원을 통해 기부를 장려하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기부나 자원봉사를 통한 사회공헌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학교교육도 절실합니다."

-불법 정치자금으로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정치권에 대한 기부문화도 큰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법률로 정치자금 기부액의 한도를 정하고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법률을 만드는 사람들이 범인이 되다 보니 범인 보고 법률 만들어 지키라고 한 셈이 됐습니다. 이에 대해 국민의 지탄과 언론의 질책이 꼭 필요합니다. 입법권을 갖는 국회의원들의 불법적이고 비양심적인 처사는 시민세력이 나서서 시정해야 합니다. 국가적 치부가 될 만한 이런 엄청난 정치자금 부정문제를 검찰이 이왕 손댔으면 국민에게 한줌의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기업은 정치자금을 줬다기보다 징수당하고서 이런 곤혹스런 결과를 당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단계에서 덮어버리고 수사를 적당히 끝낸다면 국민뿐만 아니라 기업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유사한 스캔들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끝까지 파헤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1백만, 2백만원을 횡령한 공무원은 반드시 구속되는 요즘 세상에 몇백억원을 부정하게 받은 사람들이 권력의 상층부에, 입법부에 도사리고 앉아 나라 일을 요리한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근본을 부끄럽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기업으로부터 부정하게 돈을 받아 부정하게 쓰고 그것으로 권력을 잡아 입법권을 휘두른다면 그 나라를 어떻게 정당한 국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깨끗한 나라를 이룩하느냐, 아니면 도로 주저앉느냐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왜 기부를 해야 합니까.

"기부는 자발적이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행이자 재물출연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기부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정치자금은 기부가 될 수 없습니다. 잠재적으로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부는 부모와 형제 등 특수한 연고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과도 다릅니다. 인간에게는 많이 갖고 싶고, 가진 것을 아끼려는 인색한 본성도 있지만, 가진 것을 선하게 쓰고 베풀고 싶어하는 본성 또한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 사랑을 베풀면 혜택을 받는 사람보다도 베푸는 사람이 더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나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 먼저 아는 척하고 나섰습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나몰라라할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 아마도 기부의 시작일 것입니다. 모쪼록 저희 '사랑의 택배업자'들에게 많이 기부해 주십시오(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맡고 나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지 않는 '돈내라'는 말을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기부'를 의미하는 영어 '도네이션(donation)'의 어원이 우리말 '돈내쇼'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기업인이나 고액 기부자를 만나 '다내쇼''더내쇼'유머를 곁들여 돈을 내라고 하면 흔쾌히 수락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정리=권근영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한승헌 회장은 ▶1934년 전북 진안 출생 ▶전주고, 전북대 정치학과 ▶고등고시 제8회 사법과 합격 ▶서울지검 검사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으로 구속 ▶제17대 감사원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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