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한 정치 老兵' 전선으로 속속 복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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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자식이나 며느리들이 찾아올 때마다 생활비에 보태 써라며 수십만원을 쥐여줬어요. 그랬더니 저절로 주말마다 찾아옵디다.”

60대 중반의 한 재력가 이야기다. 서글프지만 현실이다. 노인이 대우를 받으려면 현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정치권 상황과도 딱 맞다. YS와 DJ로 상징되는 구세대(old generation)에겐 ‘현금’이 있다. 그들의 영향력을 받았던 유권자와 대의원의 표가 그 현금이다. 대선주자들이 구세대를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구세대로부터 독립하기엔 대선주자들의 패기와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따라다닌다.

이상렬 기자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80세,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83세다. 대한민국 인구 중 80세 이상은 1.4% 정도다. 이 정도 연배라면 경제력도 문제지만 사회적 권위를 지키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YS와 DJ는 오늘도 한국의 정치를 쩌렁쩌렁 뒤흔들고 있다. 재임 중 IMF 위기를 맞은 YS보다는 남북화해 기치를 내건 DJ의 위력이 더 크다.

다른 ‘올드 보이’들도 2007년 대선 가도로 속속 컴백하고 있다. 최근엔 박희태(69) 전 국회 부의장과 서청원(64) 전 한나라당 대표를 놓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캠프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이미 65세 이상이 전 인구의 9%를 넘은 고령화 사회에서 나이는 더 이상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하지만 구(舊) 정치가 머금고 있던 ‘지역주의’ ‘패거리 정치’의 폐해가 다시 부활하는 게 아닐는지 비판적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인연 그리고 치밀한 계산


“각하, 제가 일년 전에 박근혜 대표와 약속을 했습니다. 언제 제가 각하 말씀을 어긴 적이 있습니까. 이해해주십시오.”

4월 5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상도동 YS 자택을 찾은 서청원 전 대표는 ‘약속’을 끄집어냈다. 그는 지난해 3월 자신을 찾아온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YS는 이날 자신의 직계인 서 전 대표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약속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정성’에 움직인다. 이 감정은 대체로 나이에 비례한다.
2004년 8월 13일 서 전 대표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그날 밤 박 전 대표는 난(蘭)을 들고 그의 집을 찾았다. 구속 중엔 서울구치소를 찾아가 위로했고, 노무현 정부와 날카롭게 각을 세우면서도 서 전 대표 사면 건의는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명절엔 잊지 않고 난이든 떡이든 마음 담긴 선물을 보냈다. 박 전 대표의 정성이 이 전 시장보다 더 컸다.

이 전 시장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알려진 박희태 전 국회 부의장의 경우엔 이 전 시장의 친형인 이상득 부의장이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두 사람은 13대 국회 때부터 20년간 의정생활을 함께 했다. 국회 본회의장 좌석도 붙어 있다. 이 부의장은 17대 국회 전반기 한나라당 몫으로 배정된 국회 부의장 자리를 박 전 부의장이 원하자 주저 없이 양보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이상득 부의장이 자꾸 ‘내 친동생인데 도와줄 거지’라고 해서 마, 그냥 ‘알았다’고 그랬던 것뿐인데…. 어떤 자리를 구체적으로 요청받은 건 없어. 그렇다고 지금 아니라고 뒤집으면 저쪽 캠프에 상처가 될 테고. 그냥 떠밀려 흘러가고 있는 중이야. ”

약속과 인연은 노병(老兵)을 움직이는 충분조건으론 미흡할 때가 있다. 그래서 ‘계산’이 숨어 있다는 시각이 등장한다. 여의도 정가엔 서 전 대표가 대선 이후 당권을 잡고 싶어 한다는 관측이 있다. 현실화할 개연성은 있다. 지지율 2위인 박 전 대표를 택한 그는 “박 전 대표에게 빚을 갚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부채 관계는 역전됐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전 대표가 이기든 지든 이제부턴 박 전 대표가 그에게 빚을 진 셈이 된다.

박 전 부의장에겐 이 전 시장이 대선 승리를 거머쥘 경우 국회의장을 맡을 것이란 예상이 따라다닌다. 현실성 있다. 당내엔 4명의 5선 의원(강재섭ㆍ박희태ㆍ이상득ㆍ김덕룡)이 있다. 이 중 강 대표는 박 전 대표 쪽으로 분류되고, 김 의원은 공천헌금 비리라는 멍에가 있다. 이 부의장은 이 전 시장의 친형이어서 운신이 제한된다. 현재로선 박 전 부의장이 한나라당 인사 중 18대 국회 의장직에 가장 가까이 있다.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 쪽의 셈법도 분명하다. 박 전 대표 쪽은 당 대표를 지낸 서 전 대표의 상징성과, 수도권과 민주계 대의원들에 대한 현실적 영향력을 높이 산다(신동철 공보특보). 이 전 시장 쪽은 박 전 부의장의 경남권에 대한 영향력과 풍부한 정치적 식견을 평가한다(배용수 공보특보). 노병과, 노병을 찾는 쪽의 계산이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외부의 시각은 차갑다. 중진 영입에 골몰하는 모습이 마치 낡은 흑백 필름 같다는 것이다. 역대 선거에서 당심(黨心)과 민심이 따로 움직인 경우는 없었다.

YS와 DJ의 식지 않는 야심

지난달 13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이 전 시장의 출판기념회에 2만여 명이 몰렸다. 청중들이 자리에 앉자 YS가 이 전 시장의 안내를 받으며 등장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YS는 이날 행사 내내 자리를 지켰다. ‘무언(無言)의 지지’였다. 사적인 자리에선 좀 더 적극적이다. YS는 자신을 찾는 민주계 인사들에게 이 전 시장 지지를 권유한다.

DJ는 노골적이다. DJ는 지난해 10월 말 목포를 찾아 ‘무호남 무국가(無湖南 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를 전남도청 방명록에 썼다. 그 뒤 DJ의 목소리는 줄곧 한 방향이었다. 한명숙 전 총리, 박상천 민주당 대표 등 범여권 지도층이 찾아올 때마다 범여권이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남 홍업씨의 무안-신안 보선 출마도 용인했다. 최근엔 "(범 여권의) 단일 정당이 최선이고, 안되면 단일후보로 가야 한다"며 선거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YS와 DJ가 움직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찾아와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이다. 첮YS의 측근인 박종웅 전 의원은 “DJ와 노무현 정부까지, 좌파에게 10년 동안 내준 정권을 이번에는 꼭 되찾아와야 한다는 YS의 생각이 확고하다. 만약 박 전 대표가 당내 경선에서 이긴다면 YS는 얼마든지 박 전 대표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DJ의 생각은 그 대척점에 있다. 설훈 전 의원은 “DJ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남북관계가 어떠해야 하고, 어떤 이가 다음 대통령이 돼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며 “지난 10년간 민주화 세력이 이뤄놓은 성취와 햇볕정책이 흔들릴까 불안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YS와 DJ의 5년 만의 부활엔 자산 재평가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IMF체제의 고통이 잊혀져가면서 YS는 부채를 털어내고 있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조짐은 DJ의 자산인 햇볕정책의 값어치를 높이고 있다. 대선 주자들은 그 자산을 보고 양김(兩金)을 찾아간다. 이강로 전주대 교수는 “차남 출마 용인 등 DJ가 노추(老醜)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데도 대선 주자들이 비난하지 않는 것은 호남과 DJ 지지자들의 표를 의식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들의 계산대로 YS와 DJ의 정치적 자산이 과연 올해 대선에서도 유효할 것인가. 대선까진 8개월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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