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자살폭탄 테러범은 바로 아내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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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테러
야스미나 카드라 지음, 이승재 옮김, 문학세계사, 308쪽, 980

11일 알제리 수도 알제 시내 중심부에서 연쇄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 시민 25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라크에서 3월 마지막 한 주간 테러로 숨진 희생자는 최소 526명에 달한다. 지난달 29일 이라크에서 발생한 연쇄 자살 폭탄 테러로 하루만에 180여 명이 숨졌다. 인명 피해가 큰 건만 걸러내 이 정도 수준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 분쟁지역 곳곳에서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이 들린다. 자살 폭탄 테러범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시켜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일까.

소설의 주인공 아민은 유능한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외과 의사다. 테러가 수시로 일어나는 이스라엘에서는 사상자들을 수술해 살려내는 외과 의사의 몸값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아민은 인종 차별을 실력으로 극복하고 고급 주택가에서 보란 듯 안락한 생활을 꾸려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던 식당이 한 이슬람 여인의 자살 폭탄 테러로 통째 날아가는 사건이 터진다.

밀려드는 사상자들을 살려내느라 정신 없는 아민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테러범이 그의 아내라는 것. 아내를 잃은 사실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경찰에 끌려가 며칠 밤낮 취조를 당하고, 가까스로 풀려난 뒤에도 성난 이웃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직장도 잃을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아내가 '도대체 왜 죄 없는 어린 아이들까지 죽음으로 내몰면서 그런 야만적이고 끔찍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내에게서 그런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배신감에 몸을 떤다. 주인공은 테러를 감행하기 직전 아내의 행적을 찾아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도대체 왜?"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의 현실은 참담했다. 거리에선 수시로 교전이 벌어져 시체가 넘쳐나고,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어린 병사들이 즐비했다. 넉넉한 인심이 넘치던 옛 모습은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친척 중의 하나가 '순교자'의 대열에 참여하자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들이 살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린다. 테러와 잔인한 보복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로막은 콘크리트 벽. 벽 바깥에선 아내가 끔찍한 테러범이었지만, 벽 안쪽에선 '성녀'에 '천사', '순교자'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가 조선인에겐 영웅이지만, 일본인에겐 끔찍한 테러범으로 비치지 않았던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등장했던 일본의 자살공격기 '가미카제'를 조종한 비행사가 일본에선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타국에선 '광기'라 읽혔듯이, 집단의 광기에 휩쓸리면 개인의 이성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인공도 아내가 누군가에 내몰려 테러를 벌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내가 테러 전에 만났다는 반군 지도자를 찾아 나선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간신히 그를 만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줬기에 우리 집사람이 그런 추악한 괴물로 변했단 말이오?"라고 묻는다. 그러나 돌아온 건 "조국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싶다면, 남들이 그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하든 강요하려 들지 말라"는 비난의 화살뿐이다. '이스라엘 여권을 가진 아랍인'으로 안락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행태가 이기적이고 역겹다는 비난과 더불어…. 주인공은 절규한다. "너는 살아있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선택했고,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 거야."

지은이는 소설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식의 규정은 내리지 않는다. 그저 아내를 포함한 인생의 모든 걸 송두리째 잃은 한 남자의 처절한 비극을 따라가며 핏빛 분쟁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줄 뿐이다.

알제리 군장교 출신인 지은이는 각종 투쟁과 독립운동 등 수많은 분쟁을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제리.아프가니스탄.팔레스타인 등 아랍권의 정치.군사.종교를 정면으로 다루는 소설을 발표했다. '폭탄 테러로 몇 명이 숨졌다'는 식의 짧은 뉴스로는 결코 알 수 없을 엄청난 비극이 지구촌에서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듯, 세상에 던지는 폭탄 같은 소설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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