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이광수·손기정부터 기생까지 일제 시대 '조선의 인물과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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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일본잡지 모던일본과 조선 1939 모던일본사 지음, 윤소영 등 옮김, 어문학사, 547쪽, 1만7000원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1939년 일본 문예춘추사의 잡지 '모던 일본'이 창간 10주년을 맞아 '모던일본 조선판'을 냈다. 일본과 조선에서 총 30만 부가 넘게 팔려나가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잡지는 희귀본으로 분류돼 소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한일비교문화센터의 연구원 네 명이 이 특별판을 광고문구까지 포함해 고스란히 한국어로 완역했다.

김소영.차홍녀.문예봉 등의 조선 여배우, 무용가 최승희, 평양의 유명한 기생까지 수많은 조선 여성이 잡지 곳곳을 장식한다. '기생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란 기사에, '평양 기생 내지(內地) 명사를 이야기하다' 좌담회를 싣는 등 기생의 비중이 특히 높다. 조선의 생활풍속에 대한 여러 글과 만화도 눈길을 끈다. 긴 담뱃대를 풍자하는 만화, 조선 부인복을 만드는 법, 하루 종일 요리와 세탁 등으로 분주한 조선 가정부인의 생활 모습 등이 실렸다. 수만 명의 엽서 응모를 받아 선정했다는 '조선 명인 백인' 명단도 눈에 띈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부터 여운형까지 다양한 인사가 선정됐다. 이광수.이태준 등 조선 대표 작가의 작품도 일어로 번역돼 실렸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받은 인상을 술회한 여러 코너들도 눈에 띄는데, 특히 조선의 공업과 풍부한 광물 자원, 값싼 노동력 등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진다. 일본의 수탈적인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내선일체'에 학도병 지원을 장려하는 칼럼들도 잡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친일 예술인을 장려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예술상'의 신설 공고도 실렸다. 이 잡지를 꼼꼼히 분석하면 새롭게 친일파로 부각될 인물들도 있을 듯하다. 식민치하 30년을 향해가던 그 시절에 친일의 그물에서 자유로웠을 인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록 일본의 눈을 통해 비친 것이긴 하나, 당시 조선의 생활.사회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옛날 잡지 들춰보는 기분으로 재미삼아 읽어도 좋을 듯하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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