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엔 의사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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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노력한다는 점에선 검사나 의사나 같지 않을까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낍니다.검사들과 온갖 사건을 접하면서 세상을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게 된 것도 제게는 큰 소득입니다."

검사들과 함께 생활하는 의사가 있다. 170여 명의 검사가 일하고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 중인 최성빈(27.사진)씨. 그는 검찰청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응급조치하고, 검사가 변사자의 검시나 교도소 수감자의 형집행정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현장에 나갈 때 동행해 조언하는 일을 한다. 수사기록에 첨부된 진단서나 의료 관련 문서에 나오는 의학용어를 검사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일도 최씨의 몫이다.

최씨는 공중보건의로 군 복무를 대신하고 있다. 최씨처럼 검찰청에서 일하고 있는 공중보건의는 전국에 3명뿐이다. 검찰은 1999년부터 사건 수요가 많은 서울중앙.수원.대구 지검에 1명씩 배치됐다.

최씨는 지난해 초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5월부터 근무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2년 더 일하게 된다.

최씨가 근무 중인 서울중앙지검에서는 조사를 받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두 달에 한명꼴로 생긴다. 10일 오후 4시30분쯤 서울중앙지검 5층 대기실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50대 후반의 남자 A씨가 갑자기 쓰려졌다. 최씨는 곧바로 현장에 투입돼 A씨의 동공반사와 감각반응.심장박동.호흡 등의 상태를 확인했다. A씨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응급 처리하면서 119구급차를 불렀다.

"그분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어요.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다가 쓰러지는 사람은 대부분 너무 긴장하거나 흥분하는 경우입니다."

최씨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는 달리 요즘 검사나 수사관들은 강압적이지 않기 때문에 위축될 필요없이 당당히 조사를 받으면 최소한 위험한 상태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난해 초여름 자신이 관여했던 사건을 잊지 못한다. 원룸에서 혼자 살던 30대 여성의 시신이 발견돼 검사와 함께 현장에 나갔다. 시신은 일주일이 넘게 방 안에 방치돼 심하게 부패됐다. 피부 전체가 갈색으로 변한 데다 진물까지 흘렀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부검 여부를 묻는 검사에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망자의 과거 병력과 진료기록에 사망의 내적요인(지병)이 없어 자연사로 보기 힘들었지만 칼에 찔린 자국 같은 타살 흔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부검을 건의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최씨는 먼지가 쌓인 채 방 구석에 쳐박혀 있던 법의학 교과서를 다시 꺼내들었다. 대학 재학시절 배우긴 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왕 맡은 일, 잘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또 미국 TV드라마 CSI도 이전보다 더 관심있게 보기 시작했다.

최씨는 "아직 무엇을 전공할지 고민 중이지만 법의학도 검찰에서 근무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대상 가운데 하나"라며 "검찰청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민동기 기자

◆ 공중보건의=병역의무 대신 3년 동안 농어촌.도서지역 등 보건의료시설이 취약한 곳의 보건소나 교도소.검찰청 등 공공기관에서 의료.보건업무에 종사하는 의사. 계약직 국가공무원이며, 3년의 의무종사기간을 마치면 병역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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