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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쉼] 벚꽃 짝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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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산들산들 부는 봄바람에 꽃잎을 떨군다.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꽃잎은 개울에 떨어져 하얀 물길을 만들고, 흙두렁에 쌓여 하얀 꽃길을 이루기도 한다. 그중 몇몇은 창문을 넘어 들어와 살며시 접시에 내려앉는다. 봄 향기를 고스란히 담은 음식을 차려낸 것이다.

꽃잎을 받아들이는 그릇도 범상치 않다. 도예가의 손을 거친 도기나 칠기로 예술품 수준이다. 그 위에 올라간 음식도 정갈하기 그지없다.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라 선뜻 젓가락이 가질 못한다. 방안에 있어도 봄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요리.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눈이 먼저 맛보고 행복해지는 음식. 바로 일본 음식의 정수라고 하는 가이세키 요리다.

가이세키 요리는 우리나라 한정식에 해당하는 음식. 일반 서민들이 평소 한정식 상을 받기 어려운 것처럼 가이세키 요리 역시 일본에서 결혼식이나 손님 접대를 할 때 맛볼 수 있는 고품격 정찬이다. 우리네 전통 한정식은 음식을 한 상에 푸짐하게 차려내는 반면 가이세키 요리는 서양의 코스 요리처럼 순서대로 낸다.

"가이세키 요리는 재료.조리법.맛이 중복되지 않도록 구성하는 게 원칙입니다. 음식의 색깔과 모양을 감안해 그릇도 신경을 써 골라 담을 정도로 정성을 드립니다." 지난 11일부터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초빙으로 일식당 '스시조'에서 일본의 가이세키 요리를 소개하고 있는 사이토 마시히코(사진(右))의 말이다. 사이토는 일본 웨스틴도쿄호텔 일식당 '마이'(舞)의 주방장이다.

"일본 요리엔 계절이 담겨 있습니다. 국 그릇의 뚜껑을 열 때 과연 무엇으로 계절을 표현했는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랍니다. 그러니 가이세키 요리를 즐기려면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봄이 낫지요." 오사카에 있는 쓰지조리사전문학교 일식교사 하타 고이치로는 가이세키 요리를 겨울이나 여름보다 봄맛으로 즐길 것을 권한다. 봄에는 대지의 영양분을 고스란히 끌어올린 채소가 풍성하기 때문. 일본 음식 재료 중 최고급으로 꼽는 도미가 제철인 데다, 죽순이나 대합처럼 일본인이 좋아하는 재료의 제맛을 볼 수 있다.

가이세키 요리는 우리나라의 궁중요리급에 버금가는 혼젠(本膳)요리가 에도시대부터 간소화돼 일반인들도 접하게 된 것. '가이세키(會石)'란 모임의 좌석이라는 뜻으로 연회 같은 자리에서 술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의미로 발전해 왔다. 전반에는 술안주가 이어지다 마지막에 밥과 된장국, 또는 국수가 나오면서 마무리된다. 조그만 그릇에 1인분씩 담겨 나와 '양이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 수 있지만 코스가 끝날 때까지 속에 부담이 없는 매력이 있다.

가이세키 요리의 가격은 일본에서도 꽤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싼 것이라 해도 5000엔 이상 각오해야 한다. 국내에서도 일인분에 10만원선이 보통이다. 그래도 한 접시 한 접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다.

글=유지상 기자 <yjsa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가이세키 요리 맛볼 수 있는 곳

■ 스시조(웨스틴조선호텔)=일본 웨스틴도쿄호텔 일식당의 주방장을 초청해 21일까지 가이세키 요리를 소개한다. 값은 7만원부터. 13일에 열리는 갈라디너(참가비 23만원)에선 새우살과 연근을 넣은 맑은 국, 바닷가재 회, 살짝 구운 참치뱃살구이(마차소금), 전복 샤브샤브 등을 푸짐하게 차려 낸다.02-317-0373.

■ 아리아케(신라호텔)=국내 미식가들은 물론 일본 음식 평론가들도 손꼽는 일식당. 광어와 도미는 완도에서 직접 사오고, 참치와 성게는 일본산만 고집한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급을 사용하며, 매달 가이세키 요리 구성이 다르다. 가격은 13만원부터. 02-2230-3356.

■ 만요(임피리얼 팰리스호텔)=음식뿐 아니라 분위기에서도 일본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 호텔 안에 있는데도 일본식 정원을 꾸며 놓았다. 창밖으로 꽃과 나무가 자라고, 다리 밑으로 냇물이 흐른다. 해산물은 주방장이 새벽시장에서 직접 구매한다고. 8만6000원부터. 02-3440-8150.

■ 하코네(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4월 한 달 동안 일본의 봄 분위기를 접시 위에 재현한 가이세키 특선(13만원) 행사를 진행한다. 참깨로 만든 수제 두부, 유자 된장에 절인 옥도미 양념구이를 맛볼 수 있으며, 식사는 죽순밥이 나온다. 02-559-7623.

■ 이로도리(르네상스호텔)=초밥이 곁들여지는 별난 가이세키 메뉴가 있다.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10가지 코스의 정통 일식 요리들이 이어진다. 가격은 11만원인데 저녁에만 주문 가능하다. 02-2222-8659.

■ 가이세키, 알고 먹으면 맛이 곱빼기!

요즘 특급호텔 일식당 등 일본인 조리장까지 초빙해 가이세키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 늘고 있어 일본 식문화의 알짜를 접하기 좋은 때다. 이왕 먹을 바엔 알고 가는 것이 더 맛있게 먹는 요령. 가이세키 요리의 진행 순서와 그때마다 맛있게 즐기는 요령을 정리했다.

(1) 진미(珍味)

식전주의 안주용으로 한두 젓가락 정도밖에 안 되는 요리. 제철 재료로 가볍게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수준으로 만들어 낸다. 고바치(小鉢), 사케쓰케(先附)라고도 한다.

(2) 전채(젠사이, 前菜)

산과 들과 바다에서 나는 제철 재료를 3가지나 5가지 종류로 담아 낸다. 계절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메뉴로 색의 배합과 공간의 미(美)까지 감안해 음식을 담는다.

(3) 맑은 국(스이모노, 吸物)

차가운 사시미를 먹기 전 속을 데워 주는 국물요리. 식사하는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담긴 것. 장국의 진국이라 할 수 있는 이치방다시(첫번째 장국)를 사용해 국물의 깊은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4) 생선회(오쓰쿠리, 사시미, 刺身)

오쓰쿠리는 사시미의 높임말로서 식사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담고 있다. 큰 접시에 담아 내지 않고 작은 접시에 나눠 낸다. 3가지나 5가지 종류의 계절 생선을 골라 담는다. 사시미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흰 살 생선회는 폰즈 소스에, 나머지 생선회는 와사비(고추냉이) 간장에 찍어 먹는다. 일본의 생선회는 우리나라처럼 살아 있는 활어를 회 떠서 바로 내는 게 아니라 얼음물에 담가 두었다 내기도 한다. 또 껍질 부분을 뜨거운 물에 데치거나 겉을 살짝 구운 것도 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을 다시마 사이에 넣어두었다 내는 '콘부지메'라는 것도 있다.

(5) 구이요리(야키모노, 燒物)

야키자카나(燒肴)라고도 한다. 소금구이뿐 아니라 된장.간장.맛술 등을 발라 구운 것이 자주 등장한다. "야키자카나 맛에 술이 술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안주 요리다.

(6) 튀김요리(아게모노, 덴푸라, 揚物)

해산물과 계절 채소를 튀겨 낸 것. '덴다시'라고 하는 튀김용 간장소스에 찍어 먹는다. 고급음식점일수록 튀김옷이 얇고 바삭거리며 느끼함이 덜하다.

(7) 찜요리(무시모노, 蒸物) 또는 조림요리(니모노)

작은 그릇에 주 재료와 함께 붉은색과 푸른색 채소를 넣어 색감을 살린다. 식욕을 돋우기 위한 것. 마르지 않도록 그릇에 담긴 국물에 푹 적셔 먹는다.

(8) 초회(스노모노, 酢物)

식초를 넣어 만든 초무침 음식으로 가이세키의 막바지를 암시한다.'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뱃속을 넉넉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해 준다.

(9) 밥과 디저트(오완, 飯/果物)

흰밥과 된장국(미소시루)에 일본식 절임김치(오싱코)가 나온다. 밥 대신 우동이나 소바가 오르기도 한다. 디저트는 계절 과일이나 일본식 떡.양갱 등을 낸다. 마지막으로 오차가 나오면 함께 한 사람들과 요리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자리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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