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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빵보다 핵" 드골 성공에 박정희 "매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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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프랑스 방위는 프랑스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프랑스인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닌 어떤 전쟁 혹은 어떤 전투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간에 그것은 우리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핵무장을 단행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형편없던 핵 기술>
50년대 말 프랑스의 드골이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절규하다시피 외친 연설문들은 이미 드골 헌법을 본떠 10월 유신을 단행한 70년대의 박정희에게 구구절절 감명을 주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70년대의 우리는-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지만-당시의 프랑스와 같이 핵무기 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전혀 없었고, 사업 일체가 박 대통령 개인의 의중과 결심에 따라 은밀히 추진되다 결국 바위에 부딪친 달걀 모양새를 면치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빵보다 핵」을 외치던 프랑스는 1960년2월 사하라 사막에서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이때 드골은『위대한 프랑스 만세』를 부르짖었다. 2차 대전에서의 굴욕과 함께 알제리·베트남 등 식민지에서도 패퇴해야 했던 프랑스로서는 감격스런 일이었다.
인도의 핵실험 성공(74년5월)에 자극 받은 파키스탄의 경우 당시 부토 대통령이 『풀을 먹고살더라도 핵 폭탄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핵무기 개발문제는 당시 각국 지도자들의 관심사였다.
60년대 우리 나라의 원자력산업은 당연히 형편없었다.
대통령 직속의 원자력원이 59년 발족했으나 62년에 완공된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에 의존해 방사성동위원소를 연구하는 정도였다. 겨우 출력 1백㎾짜리였다.
『그나마 초창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꽤 기대를 걸었던 것 같아요. 같은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원자력원의 직원들은 다른 부처의 3배에 해당하는 후한 봉급을 받았지요. 5·16이 나고, 해가 흐를수록 대우가 처지더군요. 70년대 초까지 명색이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호구지책으로 보따리장사를 했어요. 각 대학을 돌아다니며 시간강사 노릇을 했단 말입니다. 정부에서는 「실적을 내놓아라」고 다그쳤지만 원자력 연구가 몸으로 때우는 막노동도 아니고…시설이 있나요, 의욕이 있나요.』
박 대통령과 휘하의 이른바 군 출신 「혁명주체」들이 매사를 군대식으로 판단하고 지시하던 시절, 핵 과학자들은 가끔 소극적인 저항을 담은 해프닝을 벌였다. 이창건 박사(현 원자력연구소연구위원)의 회고. 『당시 서울 공릉동에 있던 연구용 원자로는 아침마다 온도를 측정해야 했지요. 이 작업에는 얼음 덩어리가 꼭 필요했는데 냉장고가 사치품으로 분류돼 있던 시절이라 구입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서너번이나 결재를 올려도 매번 제동이 걸렸지요. 생각다 못해 구입할 품목을 「냉장고」 아닌 「원자로 온도 보정용 제빙장치」로 바꿔 써넣었더니 금방 결재가 나더군요.』
「재건합시다」라는 인삿말과 함께 재건복이 유행하자 연구소 직원들에게도 외국인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넥타이를 일절 매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한 과학자가 이를 무시하고 매일 넥타이차림으로 출퇴근했다. 상관이 이것을 알고 불호령을 내리자 이 과학자는 『연구소 근처 중국음식점에 외상이 많아 수시로 외국인(중국집 주인)을 대해야 한다』고 농담으로 둘러대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민영화된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발족하면서 이 같은 분위기는 일신됐다. 핵무기개발을 염두에 둔 박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원자력연구소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자 연구진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월급도 대폭 인상됐다.
윤용구 초대소장(현 과기원 교수), 주재양 부소장(재미) 등이 중심이 돼 해외에 퍼져있는 우리 나라 출신 원자력 관련 학자 수십 명을 국내에 유치했다. 집이 없는 해외과학자들에게는 서울 서부이촌동의 35평짜리 「왕궁」아파트를 무료로 임대해주었다. 화장실이 두개나 딸려 있는, 당시로서는 최고급아파트였다고 한다.

<냉장고도 안사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면 박대통령은 70년대 중반까지는 핵무기 보유를 위해 「직행코스」를 택한 듯했다. 핵 폭탄 제조에는 우라늄 또는 플루토늄이 필요하다.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우라늄탄이,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탄이 떨어졌었다. 이중 우라늄(U235)을 원폭제조에 이용하려면 천연우라늄을 높은 순도로 농축하는 극히 어려운 공정을 거쳐야 한다. 반면에 플루토늄(PU239)은 연구용 원자로에서 우라늄을 태우고 남은 물질(사용 후 핵연료)을 재처리하면 비교적 쉽고 싸게 얻을 수 있다. 플루토늄만 확보되면 남는 과제는 핵 폭탄 설계기술과 미사일·대포 등 운반 수단인데, 이 방면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연구가 따로 진행 중이었다. 박 대통령은 당연히 플루토늄쪽을 원했다.
물론 플루토늄이라 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재처리기술과 시설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연구용 원자로(중수로)가 있어야 했다. 『그때 우리의 상황은 뭐랄까, 「쌀이 있으면 나무를 구해다 밥을 해먹겠는데 솥이 없구나」는 것이었어요. 해외를 다니며 이것저것 정보는 그런 대로 수집했지만 국내기술이나 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미국의 눈초리는 슬슬 날카로워지기 시작했지요.』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A씨의 설명이다.
이즈음 박 대통령의 비밀스런 갈증을 재빨리 간파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사울 아이젠버그(Shaul N Eisenberg).
올해 71세인 아이젠버그는 전형적인 유대계 거상으로, 장사하는 스타일이 흔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카쇼기나 미국의 하워드 휴즈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를 대해본 국내 인사들의 평가도 『한마디로 국제협잡꾼』이라는 혹평에서부터 『국내 자본축적이나 대외 신용도가 형편없던 시기에 우리 나라 발전에 기여한 면이 있다』는 부분적 긍정까지 아주 다양하다.

<인물평은 엇갈려>
영월화력 2호기를 필두로 한 발전소건설부터 쌍용·고려·동양·한일시멘트공장, 일신제강, 피아트자동차 등 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우리 나라의 숱한 기간산업들이 그의 자본·기술도입 알선으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아이젠버그는 우리측 관계자들의 눈물이 쑥 빠질 만큼 막대한 비율의 중개료를 챙겼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말을 들어보면 『나도 재무·상공부에 몸담고 있었지만, 아이젠버그가 활발히 활동할 당시 기획원을 포함해 전 경제부처의 차관급 이하 관리들은 거의가 그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가 끼어서 성사단계에 이른 사업일 경우 나는 실무선에서 끝까지 반대했어요. 실제로 그 사람이 해놓은 사업 중 지금도 잘 되는게 무엇하나 있습니까. 자본조달도 당시 우리는 세계에 유례없는 정부지불보증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없어도 산업은 일으킬 수 있었어요.』
김씨는 『나중에 내가 비서실장으로 부임한 뒤에는 대통령 각하의 허락을 얻어 아이젠버그는 물론 커미션을 노리는 다른 중개업자들도 중화학·방위산업에 일체 끼어 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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