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금융노조의 '마이 웨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은행원의 하루는 '칼 퇴근'과는 거리가 멀다. '셔터가 내려지면 진짜 일을 시작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른 아침에 출근해 고객을 맞다 보면 어느새 오후 4시30분. 마감을 끝내면 각종 대출 심사와 수출입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 창구 업무를 맡은 비정규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정규직은 오후 10시 이후에야 은행 문을 나선다. 금융노조가 영업 마감시간을 오후 3시30분으로 한 시간 앞당기려는 이유다.

하지만 금융노조의 요구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고임금과 복지 혜택을 받는데도 자신들의 편의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선 지점에서 직원들을 대놓고 나무라는 고객도 생겼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선 은행원들조차 금융노조의 결정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감 한 시간 전에 고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일선 영업점의 현실도 모른 채 한가한 주장만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모 은행의 과장은 "무리한 주장으로 일반 은행원에 대한 인식만 나빠졌다"고 하소연했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 강도가 약해진 기업은 찾기 어려운데 은행만 업무시간을 줄이겠다면 누가 선뜻 박수를 보내주겠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일선 은행노조의 반응도 시큰둥하다. A은행 노조 간부는 "임금협상 카드로 영업시간 단축안을 내놓은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다른 은행의 과장도 "아직도 국민의 뇌리에는 '은행=공적자금'이라는 외환위기의 추억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은행 살림살이가 좀 펴졌다고 거들먹거린다면 누가 속 편하게 봐주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노조는 근무시간 단축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고객이나 조합원들의 아우성에 귀를 막고 '마이 웨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이라든지 무한경쟁 이야기는 입만 아프다. 우리가 맞서야 할 미국 대형 은행들이 고객을 위해 일요일에도 영업하고 있다고 해도 귀담아들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은행들이 임금을 올리든 영업시간을 줄이든 그것은 자유다. 민간 기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금융노조에 하나 분명히 해둘 게 있다. 혹시나 다시 금융위기에 빠졌을 때 절대 공적자금에 손을 내밀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것은 최소한의 염치다. 10년 전 제일은행의 '눈물의 비디오'는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거꾸로 이번 금융노조의 근무시간 단축 배짱은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

손해용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