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앞두고 「검은돈」에 경종/대법원 수서비리 확정판결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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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일과성 비리로 판단 본질 파악에 미흡/외압실체·비자금행방등 끝내 못밝혀/공고일전 “정치입김” 관측도
정·경·관 유착으로 빚어진 대표적인 권력형비리사건인 수서지구택지특별분양 사건 관련 피고인들에 대해 28일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림으로써 사건발생 1년여만에 사법처리가 완결됐다.
지난해 2월 언론의 의혹폭로로 검찰이 전면수사에 나선 이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있었던 온갖 의문과 시비가 적어도 법률적인 차원에서는 마무리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사법부는 구조적 부패라기보다는 일부 지도급인사들의 「일과성 독직비리」로 판단하는 일관된 시각을 드러내 수서택지 특별분양이 가능했던 더큰 배후와 배경을 밝히는데 소극적인 자세였다는 평가를 면치 못하게 됐다.
사법부는 「불고불리」의 원칙에 따라 공소사실의 유·무죄를 가리는데 충실하기는 했다 하더라도 법관에게 부여된 증거조사의 직권주의 등을 적극 활용,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노력에는 미흡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한보그룹과 국회의원·공무원들이 돈을 주고 받았다는 내용 못지않게 ▲택지공급을 둘러싼 외압의 실체 ▲청와대와 민자당 고위층의 관련 여부 ▲한보비자금행방 ▲검찰의 축소수사여부 등에 관심이 모아졌으나 결국 어느것 하나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더욱이 정부와 민자당의 개입정도를 밝히기 위해 변호인들이 증인으로 신청한 민자당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김종필·박태준 최고위원,홍성철 전 청와대비서실장,고건·박세직 전 서울시장,권영각·이상희 전 건설부장관,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등 19명에 대해 사법부가 전원 기각한 것은 단죄의지 부족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사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대법원의 확정판결과는 별도로 수서사건 뒤에 숨어있는 권력의 조직적인 비리등 각종 의혹은 역사의 평가속에 남게 됐다.
대법원의 관련 피고인 전원에 대한 상고기각은 사실관계를 다투는 하급심과 달리 피고인에게 적용된 법률의 적정성만을 심판하는 상고심의 기능상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이에 따라 특히 국회의원들이 정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의 명목이 뇌물이냐,정치자금이냐를 놓고 검찰과 변호인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갔으나 결국 직무와 관련된 뇌물로 판가름났다.
대법원이 이와 관련,뇌물죄는 직무행위의 불가매수성을 직접적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으며 의무위반행위의 유무와 청탁의 유무 및 시기의 전후를 따지지 않고 법령에 의한 직무뿐 아니라 통상적인 권한에 속하는 직무등 일체의 공무과정에 적용된다고 폭넓게 해석한 것은 주목거리다. 즉 의원들과 정회장과의 관계,돈액수,수수시기 등을 종합할때 뇌물임이 명백하며 오히려 더 나아가 이 경우 정치자금법 위반여부까지 추가로 검토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같은 대법원의 판결은 정치자금 수수를 둘러싸고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이 마비된 일부 의원들에게 어떤 경우라도 「검은 돈은 받지 않아야 된다」는 경종을 울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14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관련된 의원들의 신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형사사건으로 집행유예 이상이 확정되면 피선거권이 제한된다」는 국회의원선거법 규정에 따라 이원배·이태섭·오용운 의원이 의원직 자동상실과 더불어 이미 의원직 사표가 수리된 김동주 전 의원과 함께 다음달 24일 실시되는 14대 총선에 출마할 수 없게된 것이다.
13대들어 의원직이 상실된 경우는 89년 당선무효 소송에서 패소한 김명섭씨와 밀입북사건으로 90년 8월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자격정지 10년·추징금 3천5백만원이 확정된 서경원 전 의원(53)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로 사법사상 순수 형사사건과 관련,의원직을 잃어버린 최초의 케이스다.
이때문에 일부 피고인들은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자 14대 총선출마를 겨냥해 항소심에서 구속피고인과의 분리심리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처리한 것에 대해 국회의원도 범죄로부터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거일공고를 앞둔 시점에 피고인들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확정판결을 내린 것은 정치적 목적을 지닌 사건처리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일기도 했다.<김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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