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서실(65)미 감시 피해"낮은 포복"작전|박 대통령「핵」개발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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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를 갖고 싶어했다. 그는 70년대 내내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노력했다.
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필요한 시기에 한국 내 필요한 지역에 마음대로 반입·반출하던 핵무기, 즉 핵우산의 그늘에서 벗어나 버젓한 「국산품 핵 폭탄」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좌절됐다. 7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기를 일관해 박대통령은 국내에서 확립한 독보적 권력과는 정반대로 한낱 약소민족의 추장정도에 불과한 자신의 국제적 위치를 절감하고 시종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특히 미국에 대해 그러했다.
『우리같이 작은 나라는 고슴도치가 되어야 한다. 온몸을 바늘로 둘러싸 사자나 코끼리 같은 큰 동물들이 작다고 깔보고 함부로 짓밟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에 따라 방위산업에 박차를 가하던 박대통령은 해가 갈수록 죄어드는 미국의 압력에 거듭 좌절해야 했다. 사방을 살피며 핵 보유국으로의 진흙길을 끈기 있게 낮은 포복하던 생애의 후반도 결국 10·26으로 마침표가 찍혔다.

<사기극에 휘말려>
핵무기 문제는 지금도 생생한 「현재진행형」이다. 때문에 매우 민감하다. 당시 핵 개발에
관여했던 많은 이들이 『나는 아직 현직에 있다』거나『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핵에 얽힌 비화를 밝히기를 꺼리거나 거부했다. 그러나 공통된 증언은 『핵무기개발은 한마디로 역부족이었다』는 평가였다.
한 과학자는 박대통령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로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초(납)를 접착제 삼아 날개를 몸에 붙이고 섬에서 날아 탈출하면서 아버지의 엄한 경고를 잊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초가 녹아버리는 바람에 에게 해에 추락, 익사했다는 이 신화는 바로 박대통령의 처지와 흡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대통령만이 핵무기를 갖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절대권력자는 국제사회에서도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마련인 모양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박대통령 못지 않게 원자탄 개발을 희망했었다. 그러다가 보기 좋게 「핵 사기극」에 휘말렸다.
1950년대 초 해군장교로 근무하면서 이 어처구니없는 희대의 사기 극을 지켜보았던 김재원박사(73·전서울대·인하대교수)와 지금 모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L씨 등 관계자들의 증언.

<"장 총통에 뺏긴다">
『6·25동란이 한창이던 51년 봄이었어요. 진해해군기지에 한 일본인이 나타났습니다. 오카다라는 환갑 먹은 노인이었는데, 우리측 해군 고위간부들이 경무대(청와대의 전신)의 허락을 받고 해군함정을 일본에 보내 쉬쉬하며 모셔왔다는 사람이었지요. 태평양 전쟁막바지에 일본도 핵무기를 연구했었다며 바로 이노인이 원자탄을 거의 다 만들다 일본패망으로 뜻이 꺾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김일청 이라는 이름의 재일교포가 이 일본인 기술자를 고국에 소개했고, 당시 해군의 고위간부가 앞장서서 이승만대통령에게까지 다리를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원자탄·수소탄을 다 만들 수 있는 귀한 기술자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자유중국의 장개석총통이 가로채 갈지도 모른다」고 꾀는 바람에 이박사도 솔깃했다고 합니다.
이대통령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장군(80년 작고)을 통해 당시로서는 거액인 10만달러를 연구비 조로 내놓으며 『꼭 성공해 북진통일을 이루자』고 신신당부했다. 이 돈은 당시 대한중석을 통해 조달한 것으로 안다고 한 관계자는 회고했다. 해군의 총책임자인 손씨는 일본인 기술자의 정체나 영입과정을 뒤늦게 서야 알았을 뿐 우리측 「바람잡이」는 따로 있었다. 오카다는 진해 앞 바다의 무인도인 면적이 1평방km도 안 되는 조그만섬(소모도)에 모셔져 칙사대접을 받았다. 해군기술연구소가 이 때문에 설립되었고 오카다는 「크게 써먹는다」는 뜻에서 이용 대라는 한국이름과 해군대령 계급장·장교제복을 지급 받았다. 무인도에는 그를 위한 개인연구소 건물이 따로 세워졌다. 또 이국생활이 적적할까봐 반씨 성을 가진 20대 여인이 물색돼 동거하며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육지(진해)에서 불과 4·4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해군헌병들이 밤낮으로 엄중히 경계를 폈다.

<바다서 실험까지>
아무리 우리 기술수준이 보잘것없었고 전쟁중이라 마음이 다급했다고 치더라도 일국의 대통령과 군수뇌부가 함께 속아넘어간 것은 단순한 희극으로 넘겨버리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그 친구, 알고 보니 한낱 배터리 제조 기술자였어요. 수소폭탄 만드는 장치라며 설계도면을 한 뭉치 가져와 경무대에서까지 브리핑을 했답니다. 도면은 뒤에 들통난 후에 알았지만 일본 동경 도에 있던 이 화학연구소에서 흘러나온 사이클로트론(원자핵 파괴장치·핵물리학에서의 실험시설)의 도면이었어요. 실제 핵무기를 제조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었지요. 오카다의 주장인즉 『고압 발전시설만 만들면 그걸 이용해 간단히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는 수은정류기 제작이 전문이었기 때문에 물을 전기 분해해 수소와 산소를 빼내는 일은 잘할 수 있었다. 「수소폭탄」이 아니라 「수소」를 만드는 기술자였던 셈이다.
『그 다음해부터 몇 차례에 걸쳐 「핵실험」이 이루어졌어요. 진해 앞 바다에서였지요. 이대통령도 한번 참관하고는 깜빡 속아넘어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오카다는 물에서 얻은 수소를 철제탱크로 된 부표(부이)에 넣고 폭발시킨 것뿐이었지요. 수소가스가 폭발하자 「저것은 10볼트정도의 전압에서 만든 폭탄입니다. 1백만 볼트 속에서 만들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정도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력한 핵폭발이 일어납니다」라고 속였어요. 이 사기 극은 결국 김재원씨 등 해군의 젊은 과학도들에 의해 폭로되고, 오카다는 53년에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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