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비상구가 없다』<이순원 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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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순원씨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그곳엔 비상구가 없다』(『문예중앙』봄호)는 이른바「욕망의 해방구」인 압구정동의 타락한 문화와 품속에 대한 소설적 대응이다. 물론 여기에서 압구정동은 특정한 공간적 지명을 넘어서는 용어다. 압구정동은 일종의 문화사적·품속사적 상징이며 또한 작가의 표현에 의한다면 「이 땅 졸부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인 것이다. 이씨는 그 압구정동과 대결함으로써 우리시대의 중요한 소설적 가능성을 펼쳐놓고 있다.
소설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그 시대의 환부와 고통·상처에 대한 진지한 되돌아봄이며 소설이라는 형식이 그 사회의 징후와 추세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민감한 성감대라면, 이씨의 『그곳엔 비상구가 없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소설적 접근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소설적 접근은 이를테면 작가 자신의 성실한 취재와 자료조사, 품속의 핵심에 대한파악을 통해 그 시대의 「거대한 상징」과 대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곳엔 비상구가 없다』는 작가의 내면 고백도 아니며, 또한 절실한 체험을 소설에 용해시킨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소설가가 가공해낸 개연적 허구-그러나 그 허구는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통렬하게 되돌아보게 하는가-를 통해 한시대의 타락한 물질적 욕망과 성적욕망을 비판·풍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소설적 접근의 요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곳엔 비상구가 없다』는 계몽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이씨의 계몽주의는 도덕적 우월성에 근거한 국외자적 비판이라기보다는 그 모순과 환락의 「똥통」에 직접 들어가 그곳의 삶을 허구적으로 살아봄으로써 그곳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을 시도하는 비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서있는 계몽주의의 자리가 무척이나 위태위태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압구정동이라는 주제 자체가 어떠한 비판적 형상화도 그 체제 내에 흡수할 만큼 불가사리 같은 구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압구정동의 풍속과 문화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결과적으로 압구정동의 명성과 권위를 확대시키게 되는 이 아니러니! 아마도 앞으로 압구정동과 대결하여 문학적성과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씨의 『그곳엔 비상구가 없다』는 마치 유하씨의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소설문학의 중요한, 동시에 위험한(?)가능성이라 할 것이다. 【권성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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