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센터 재검토 파장] 17년 끈 국책사업 '다시 원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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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원칙 없는 정책 결정으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원전센터) 부지 선정이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정부는 그동안 부안지역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법한 행정절차를 거쳐 후보지 신청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폭력시위에 굴복하지 않고 원전센터 후보지 선정을 추진하겠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 하지만 주민투표와 관련해서도 '불가→가능→불가'등으로 혼선을 거듭한 데 이어 이번에 부안 이외의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추가 유치 신청을 받겠다고 밝혀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또 깼다.

원전센터 주무부서인 산자부의 한 공무원도 이날 발표를 두고 "일관성 없는 정책에 혼란스럽다"며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원점 재검토 배경=정부가 부안 이외의 다른 지역에 대해 뒤늦게 추가 신청의 기회를 주겠다고 나선 것은 반대하는 부안 주민을 압박하면서, 만일의 경우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한 셈이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2개월 전부터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부안 주민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주민의 80% 이상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위도에 원전센터를 설립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17년 동안 끌어왔던 국책사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련을 쉽사리 버릴 수도 없었다. 결국 부안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여기서 실패할 것에 대비해 다른 지역에서 신청을 받는다는 대안을 마련했다.

우선 부안에서는 최근 원전센터 유치를 주장하는 단체가 설립되고 시위가 평화적으로 전개되면서 대화의 분위기가 싹텄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다른 지역으로 원전센터가 갈 수 있다"고 강조해 부안 주민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길 기대한다.

정부 관계자는 "내년 초까지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면 부안 주민들이 원전센터 유치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차분히 따져 현명한 판단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부안에 원전센터가 설립되면 당초 약속대로 앞으로 20년간 2조1천억원 이상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정부가 부안에서 발을 빼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은 10일 새로운 방침을 발표하면서 "결과적으로 국민과 지역주민에게 혼란과 불편을 끼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미 부안은 포기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안 주민에게 사과해 발을 뺄 명분을 찾는 한편, 현재 원전센터 유치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다른 지자체에 당근을 던져 대안을 찾으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안사태를 통해 시민.종교단체와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를 지켜본 다른 자치단체에서 과연 원전센터 유치를 신청할지 의문이다.

부안에 대한 우선권도 다른 지역이 선뜻 나서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원전센터 유치 신청을 내도 반드시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신청할 유치지역에 대해서는 지원도 사실상 축소된다. 정부는 지원금(3천억원).양성자가속기 사업.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등 직접지원은 계획대로 추진하겠지만 간접지원은 심사과정에서 부지선정위원회와 지자체 간 협의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정책 신뢰성에 흠집=정부는 초기에 부처 간 협의도 없이 현금보상을 약속했다가 철회하는 촌극을 연출하면서 반대 주민들의 세력을 키웠다. 그 후에도 공청회 한번 제대로 열지 못하는 등 주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주민들의 폭력시위가 확산되는 것도 막지 못했다.

특히 이번에는 당초 계획에도 없던 '추가 신청'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결국 이해 당사자가 반대하면 이미 정해진 원칙도 바꿀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셈이다.

尹장관은 "정부가 결코 일부 주민의 반대로 국책사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도입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앞으로 주민 기피 시설을 정부가 추진할 때 주민들이나 이익집단들의 반대와 저항은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종윤.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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