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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과 올 수 성적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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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48세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도 초등학교 때 공부깨나 했을 법하다. 미국에서 명문 컬럼비아대를 다녔고, 로펌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걸 보면. 아버지(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를 따라 해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국내에서 지냈다니 이때 '올 수'도 한두 번은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그가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의 주역이 됐다. 합의문이 발표되던 2일, 그를 포함한 우리 측 대표단은 "수우미양가로 평가한다면 수를 받고 싶다"고 했다. 과연 수를 줘도 될까.

김 본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Life is tough. It's tougher, if you are stupid(인생은 고달프다. 멍청하면 인생은 더 고달파진다)." 평탄한 삶을 걸었을 그에게 별로 어울리는 말 같지는 않다. 지난주 한 외교관에게 부연설명을 부탁했다. "매사에 모든 걸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해야 인생이 고달프지 않게 된다는 의미로 이 말을 하시곤 했죠."

이 같은 원칙은 업무 성향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했다. 외교관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다. 김 본부장은 철저히 성과를 따진다. 직원들이 본부장에게 잘 보이려고 '눈도장'을 찍을라치면 "내가 보는 앞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하지 말라"고 야단친다. 그는 보스랍시고 술 자리에 간부들을 쭉 불러모아 무게 잡지 않는다. 직원들과 업무와 관련해 토론하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그때야 저녁자리까지 이어져 업무 이야기를 나눈다. 이 외교관은 "김 본부장을 미국 스타일로 봐야지, 한국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김 본부장은 지난달 '운(運) 좋아지는 비결'을 들려준 삼성그룹의 한 사장과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 사장이 "초등학교 때 책에서 읽었다"며 가르쳐 준 비법 세 가지는 이랬다.

①양말을 신을 때는 반드시 오른쪽부터 신어라

②신발을 신을 때도 꼭 오른쪽부터다

③장갑을 낄 때도 마찬가지다

사장은 그 책을 읽은 뒤부터 오른쪽 양말부터 신는다고 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도 오른쪽 신발부터 찾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이 무슨 싱거운 소린가. 그는 "이렇게 행동하면 항상 준비하고 정신 차리게 되지"라고 말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늘 대비하는 삶과 실적을 우선하는 기업가적 마인드, 이런 면에서 김 본부장은 비법을 일러준 삼성 사장과 똑같았다.

이제 김 본부장 앞에는 유럽연합, 중국과의 FTA가 기다리고 있다. 일본.인도.호주도 줄 서 있다. 고학년이 되면서 교과과목이 늘 듯 'FTA 과목'도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과목에서 김 본부장이 '올 수'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의 인생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생이 고달프지 않기 위해서. 또 수많은 한.미 통상현안을 FTA 한 방으로 해결한 '미국 과목'에 대해서는 지금이라도 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잘했느냐, 잘못했느냐의 논란은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기에 지금 그의 성적을 매기기에는 좀 이르다. 그런데 매사에 철저히 대비한 데서 나온 한.미 FTA 결과라면? 연줄과 학맥을 따지는 관료사회에서 성과와 실적주의로 일궈낸 산물이라면? 당장 그의 성적표에는 수가 아니라 수+로 기록될 것이다.

정선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