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없으면 한국 영화 어땠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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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모두 40대가 된 최민식·송강호·설경구는 200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남자 배우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의 약진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타’라기보다는 한국 영화의 대표 남자 ‘배우’ 3인의 공통점을 꼽아보니 오로지 연기력과 노력이었다. 그래서 더 믿음직하다.

글 김봉석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 ‘괴물’에서는 결점투성이의 어수룩한 아버지를 연기했던 그가, 이번에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생계형 조폭으로 등장한다. 좀 사나워 보이긴 하지만,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성실하게 임무를 다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조금씩 어긋날 것만 같은 불안감도 엿보인다. 약간의 광기가 엿보이는 가장의 연기는, 송강호가 아니면 힘들 것 같다. 설경구가 맡으면, 송강호와는 전혀 다른 아버지가 될 것이다. 언제까지나 촌놈 같기만 하던 설경구도, ‘그놈 목소리’에서는 지적인 이미지의 가장으로 변신했다. ‘올드보이’에서 ‘오늘만 대충 수습’하는 아버지를 연기한 최민식도 독특한 연기를 보여줄 것 같다.

이제는 모두 40대가 된 송강호ㆍ설경구ㆍ최민식은 200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남자 배우들이다. 아니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의 약진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들을 ‘스타’라고 부르기는 좀 꺼려진다. 스타라고 하면 이병헌ㆍ장동건ㆍ정우성 같은 배우들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대표 ‘배우’라고 하면 당연히 송강호ㆍ설경구ㆍ최민식이다. 브라운관의 ‘꾸숑’으로 인기를 끌었던 최민식만 출발점이 다르지만, 모두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었고,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겨서는 개성적인 연기로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혀왔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사실 묘한 일이다. 할리우드의 경우를 보아도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대중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스타의 몫이다. 연기는 조금 처지지만, 외모와 카리스마로 대중을 극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수퍼스타들. 하지만 수퍼스타가 아닌 송강호ㆍ설경구ㆍ최민식은 얼굴이나 이미지 대신 오로지 연기력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대중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에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관객을 스크린에 주목하게 만들고 감동을 안고 돌아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한국 영화의 전성시대는, 이들이 출연했던 다양한 스타일과 장르의 ‘수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민식, 小市民의 자화상

출발이 가장 빠른 것은 최민식이었다. ‘서울의 달’ 등 TV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최민식은 한석규와 공연한 ‘넘버3’(1997)에서 이미 원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검사 역을 연기한 최민식은 한석규의 파란만장한 연기에 뒤지지 않는 공력을 과시했다. 최민식의 야성을 보여준 ‘조용한 가족’ ‘쉬리’를 거쳐 99년 작인 ‘해피엔드’에서는 잘난 부인을 살해하는 못난 가장의 증오를 탁월하게 그려냈다. 이후 ‘파이란’ ‘취화선’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 등에 출연했다. 한때 미남 배우로도 불렸던 최민식이지만, 지금은 세월의 무게가 그대로 새겨진 중후한 배우다. 최민식은 짓눌린 가장, 자꾸 바깥으로만 밀려나는 소시민의 자화상을 탁월하게 그려낸 배우다.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잔인함은, ‘해피엔드’에서 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굴욕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송강호, 마술사 같은 變身

‘넘버3’의 인상적인 조폭 연기와 ‘조용한 가족’ ‘쉬리’의 조연을 거친 송강호의 매력을 순식간에 폭발시킨 영화는 ‘반칙왕’(2000)이다. 한없이 소심한 회사원이 악역 레슬러로 변신해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내용의 ‘반칙왕’에서 송강호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복수는 나의 것’ ‘살인의 추억’ ‘괴물’ ‘우아한 세계’ ‘밀양’으로 이어지는 송강호의 필모그래피는 정말 화려하다. 어수룩한 바보에서 비정하고 폭력적인 살인마까지, 송강호는 놀라운 변신을 보여준다.
앞으로 송강호가 보여줄 인물들의 내면이 무엇일지 여전히 궁금하다.

설경구, 보통 남자의 溫氣

‘박하사탕’(1999)으로 이름을 알린 설경구는, ‘오아시스’와 ‘공공의 적’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회와 가족 모두에게 버림받은 전과자이지만, 그에게선 알 수 없는 ‘온기’가 느껴진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이미 타락한 경찰이지만, 더욱 타락한 사회가 결국 그를 돌아서게 만든다. 설경구는 밑바닥 인생의 막가는 세상살이를 보여주면서도, 인간적인 기운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멜로 영화 ‘사랑을 놓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설경구가 보여주는 남자의 이미지는, 그리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이 세상 보통 남자의 모습이다.

우리 인생과 모험을 대변하다

송강호ㆍ설경구ㆍ최민식의 필모그래피는 결코 상업적인 영화들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괴물’ ‘오아시스’ ‘파이란’ ‘살인의 추억’ ‘공공의 적’ ‘해피엔드’ 등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 지금 이곳의 이야기를 예리하고 깊이 있게 파고들어간 작품들에서는, 반드시 이들을 필요로 했다. 우선 이들에게는 한 편의 영화를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월등한 연기력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한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 한가운데를 거쳐온 보통 사람들의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괴물’을 보면서, ‘오아시스’를 보면서, ‘파이란’을 보면서 그 남자들이 보여주는 ‘인생’과 ‘모험’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마 송강호ㆍ설경구ㆍ최민식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의 폭이 지금처럼 순식간에 넓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극무대에서 기초를 닦은 이들은, 능숙하게 스크린에 적응해 우리 시대의 다양한 군상을 우리의 눈앞에 각인시켜 주었다.

송강호ㆍ설경구ㆍ최민식은 이제 40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 영화의 주력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한국 영화가 단지 스타에 의존하는 뻔한 영화가 아니라 여전히 도전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 영화는 조정기에 있지만, 이들의 활약이 있는 한 쉽게 수그러들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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