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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平天下보다 治國부터… 김일성 전 주석 순위권 근접”

중앙일보

입력

▶ 사진 좌로부터 김 구·이순신·안중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세종대왕이 광개토대왕을 제치고 인물 순위 1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강력한 도전 정신을 지닌 리더보다 백성의 살림살이를 돌볼 줄 아는 따뜻함이 더 절실한 때문은 아닐지….


100명의 역사인물 중 대학생 한 명에게라도 존경한다는 대답을 얻은 사람은 모두 59명이었다. 이들의 분포를 보면 요즘 젊은층의 특징인 다양성과 개성이 역사인식에도 투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을 존경하는 학생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학생보다 훨씬 많은가 하면, 안중근 의사는 존경해도 안창호 선생은 존경하지 않는다는 학생이 많았다. 고 전태일 열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동시에 존경한다는 모순적인(?) 생각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세종대왕은 모두 24명의 대학생이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고, 광개토대왕은 23명이 선택했다. 근소한 차이였지만 일반시민과 학자, CEO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모두 광개토대왕이 1위였다는 점과 대비된다. 젊은 나이에 먹고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인 대학생들에게는 영토 확장도 좋지만 내치(內治)에 능한 리더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결과다.

다른 설문에서는 Top 10에 이름이 없었던 고려 태조 왕건이 김구 선생과 함께 4위로 높은 순위에 오른 점도 특징이다.

대학생의 역사인식에서는 TV 대하드라마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듯한 결과도 엿보였다. 존경하는 인물 4위에 오른 고려 태조 왕건은 모두 17명의 대학생이 선택했는데, 이는 얼마 전까지 방영된 TV 드라마의 영향인 것으로 분석된다.

설문에 참가한 한 대학생은 “예전에는 교과서에서 접한 내용이 전부였지만 최근 TV 드라마를 통해 왕건에 관해 새로운 내용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왕건과 같이 TV 드라마에 등장해 독특한 캐릭터로 젊은층에게 큰 화제가 됐던 신돈을 존경한다는 대학생이 3명이었던 점, 그리고 역시 최근 방영된 TV 드라마에서 새롭게 조명된 역사 속 인물인 소서노를 존경한다는 응답이 5명이었던 점에서도 이런 현상을 읽을 수 있다.

경제인들 중에서는 16명의 대학생이 선택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6위에 올랐다. 반면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6명의 대학생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0인으로 선택해 젊은 세대에게는 잊혀져 가는 인물이 된 듯한 인상을 줬다.

CEO들이 뽑은 톱 10에 오른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를 존경한다고 대답한 대학생이 한 명도 없다는 점도 한국경제의 밑바탕을 일궈낸 기업 창업주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대목으로 판단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대학생이 의외로(?) 많다는 점도 특이하다. 박 전 대통령은 15명의 대학생이 존경한다고 답해 7위에 올랐다. 한때 진보세력을 자처하던 대학생들에게 박 전 대통령은 극단적 폄하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변화로 볼 수 있다.

대학생도 박정희 전 대통령 존경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젊은층의 재평가는 역시 답답한 경제상황과 관계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한 온라인 취업 사이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젊은 구직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3위에 올랐다. 당시 구직자들은 박 전 대통령의 추진력을 존경의 이유로 들었다.

문익점이 공동 8위에 오른 점도 다른 세대와 다른 특징이다. 해외 문물에 대해 개방적인 젊은 세대의 사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받아들일 만한 외국의 좋은 아이디어를 국내로 들여오자는 뜻이 담겼다는 해석이다. 국내 역사인물 중 추모를 뜻하는 사당 수가 많기로 유명한 문익점은 국가에서 사당을 짓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 후손들이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주요 부조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학업에 열중하는 대학생들이지만 정작 학자들에 대한 평가는 다소 박했다. 신라시대 김대문, 고려시대 이규보, 조선시대 김시습 등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었지만 이들을 존경한다는 대학생은 없었다. 이황·이이 등은 다른 학자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학생이 존경한다고 답했지만, 순위권에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실사구시를 중시한 실학자인 정약용은 11명의 대학생이 존경하는 인물로 선택해 공동 8위에 올랐다. 최근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인문학 위기론’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보인다.

10위 안에 오르지 못한 인물 중에서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이 눈길을 끈다. 김 전 주석은 8명의 대학생이 가장 존경한다고 대답해 장영실·이이 등과 함께 공동 11위였다. 냉전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대학생들에게 김 전 주석의 존재는 ‘적’이라기보다 ‘역사 속의 인물’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대학생이 1명뿐이라는 점은 다소 의외였다.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인물이지만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기보다 주로 깎아내리기에 열중하는 정치풍토가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문화·예술계 인물들은 업적도 중요하지만 인물의 지명도가 선택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5명의 대학생이 고 백남준 씨를 존경한다고 대답했고, 조용필 씨를 존경한다는 대학생도 2명이나 됐다.

정일환_월간중앙 기자(wh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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