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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재래식 무기 국산화 작전 맨발로 뛴 「번개 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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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인생의 종말에 다다른 70년대 후반 박대통령은 청와대출입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말을 가끔 했다고 한다.
듣는 이들에게는 당대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는데, 노 독재자의 완고한 아집이 강하게 드러나는 면도 엿보인다. 많은 권위주의 통치자들이 남발한「역사만이 나를 평가할 수 있다」는 식의 독단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위압적인 독설로만 치부될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적어도 박정희와 그의 수족이 되어 움직였던 일단의 엘리트그룹에는 충분히 근거 있고, 공감을 사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휘하에서 그야말로「미친 듯이」일하고 그의 사후에는 한동안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가 70년대 방위산업의 숨은 주역으로 당시 혈기왕성한 청·장년 층이던 수백 명의 과학기술자들이다.
71년 11월11일 청와대비서실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ADD)로 밀명이 떨어졌다.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 무기와 주요 군수장비를 앞으로 4개월 내에 국산화하라』는 황당한(?)지시였다.

<국방과학 연 발칵>
이 명령은「번개사업」이라는 이름아래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다. 금속·전기·전자·화공학 등 무기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 한 당시 상황에서 누가 보아도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것은 숫제 아무 것도 없는 판에 생으로 만들어 내라는 식이었다.
국산기관총이나 박격포는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원철 청와대경제2수석비서관이 부임(11월10일)한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다.
예비역 중장으로 국방과학연구소 초대소장을 지낸 신응균씨(현 국제화재해상보험고문)의 회고.
『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부 소장으로 있다가 70년 8월6일 연구소가 발족하면서 소장에 취임했습니다. 연구소의 기초를 닦는데 서둘러도 4∼5년은 필요하다고 보았지요. 3군에 나뉘어 있던 군 연구소를 통합한 국방과학연구소는 처음에는 서빙고의 옛 학교건물을 쓰다가 얼마 후 청와대 근처 옥인동의 구 방첩대 건물로 이사했어요. 하루는 김정렴 비서실장 이 나를 부릅디다.「이제 뭔가 해야될 거 아니냐」면서「지금 군이 갖고있는 미제무기들이라도 우선 단시일 내에 국산화하라」는 각하지시를 전하는 거였어요.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합리적인 성품이던 신씨는『그때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이빨이 하나 둘씩 흔들려 결국 윗니를 4대만 남기고 몽땅 뽑아낸 뒤 의치를 해 넣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무리가 감행된 데는 물론 그 이전의 1·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 등 북한의 대남 도발과 이해 3월의 주한미군 철수(2만명)가 빚어낸 위기의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총알 안나가도 돼">
번개사업에는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소장들로 손꼽히던 10여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동원됐다. 후에 품목변동이 있었지만 우선 소총·수류탄·지뢰 등을 11개 부문으로 나누어 연구에 들어갔다. 11개 부문에 책정된 총예산은 겨우 9백70만원이었다고 한 연구참여자는 전했다.『총알이 안나가도 좋으니 일단 만들고 보라』는 엄명 속에서였다. 연구작업의 야전지휘관은 물론 자타가 공인한「맹장」오원철 수석이었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지금도 한결같이『그때처럼 열심히 일해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다들 미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취재에 응한 뒤에는 반드시『요즘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사심 없이 일에 몰두한 사연들을 더도 말고 사실 그대로만 전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해 연말의 성탄절은 물론 신·구정 때도 집에 들르지 못했고 연구실의 전등은 24시간 밝혀져 있었다. 그들이 곤란해했던 일 중 하나는 연구성과를 그때그때 정리하는 타이피스트 여직원들을 자정 가까운 시간에 무사히(?)귀가시키는 일이었다.
『그때는 통금이 있을 때 아닙니까. 남의 집 따님들을 외박시킬 수는 없고, 일은 늦게 끝나고…. 오 수석에게 부탁했더니 야간통행증이 붙은 차를 한대 구해주더군요. 통금시간을 전후해 여직원들을 일일이 집 대문 앞까지「반납」시켜주었지요.』
역 설계공학(REVERSE ENGINEERING)이라는 개념이 국내에서 본격 활용된 것이 이때였다. 남의 나라 제품을 거꾸로 분해해 부품을 철저히 연구, 국산화하는 방식으로 2차대전 후 일본이 이 방식으로 기술자 팀의 터전을 마련한 것은 널리 알려진 예다.

<도장밥으로 본떠>
연구팀의 일원으로 군용지프를 중심으로 한 군사기동장비의 국산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한백씨(현 기아자동차 부사장)의 증언.
『그때 무엇하나 제대로 있었습니까. 자료도, 실험시설도 없고…게다가 돈도 없을 때 아닙니까. 정열로 뭉친 고급기술인력과 사명감, 대통령의 굳은 의지뿐이었지요. 군에서 미제무기나 장비를 구해다 분해하는 거예요. 그걸 기초로 설계·도면을 작성합니다. 도면 규격대로 부품을 만들어 조립해 보면 이게 생각대로 원래의 미제처럼 작동되지가 않아요. 당연한 결과겠지만…. 총포의 구경을 본뜰 때 도장밥(인주)을 이용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부품이 안 맞으면 설계도면을 뜯어고칩니다. 그리고 다시 제작해보는 거죠.』
시행착오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하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연구진중 수류탄·방탄모 등의 국산화를 이루어 냈던 한필형 박사(전 원자력연구소장)의 경험담.
『그때 군에는 미군이 준 고구마 모양의 구식 수류탄과 일부 방망이 수류탄이 있었지요. 너무 크고 무거워 우리 체형에는 맞지 않았어요. 장병들을 상대로 실험을 거듭 해보니 사과모양의 모델이 기존 것보다 5m가량이나 더 멀리 던져지는 거였어요. 그래서 무게를 조절해 둥근 모양의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남들이 성능을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어요. 저는 엄연히 인간공학을 적용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 즈음 미국이 만든 최신형 수류탄이 입수됐는데 바로 사과 모양이었어요. 다들 감탄하면서 박 대통령에게도 보고가 올라갔고, 비로소 인정을 받았지요.』<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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