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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산 ‘비리 온상’ 오명 벗으려 기술 개발, 전화위복 됐다
━ 육군 준장 출신 채우석 한국방위산업학회장 “무기는 설령 100년 동안 쓸 일이 없다 해도, 단 하루라도 갖추지 않을 수 없다.”(兵可百年不用, 不可一日無備) 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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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70년대 중화학공업 이끈 ‘오 국보’
지난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오원철 전 수석. [중앙포토]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의 효시’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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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 기틀 마련 오원철 전 경제수석 별세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2015년 중앙선데이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한국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의 효시’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이 30일 숙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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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청와대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김진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현대사에서 청와대는 정권의 중심이었다. 청와대가 바로 서면 정권이 살고 흔들리면 정권이 죽었다. 박근혜의 청와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박근혜는 정권을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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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56) 박 대통령의 술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들과 자주 저녁을 했다. 반주는 막걸리 아니면 양주였다. 막걸리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의 일반 양조장에서 만든 보통 막걸리였다.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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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과 양자외교 어려워, 동북아안보협의체 만들어서…
남덕우 1960년대 대학에서 성장이론을 강의하다 6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장관에 전격 발탁됐다.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대통령 경제특보·국무총리를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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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과 양자외교 어려워 … NASO 만들어 국제 문제 풀어야
남덕우 1960년대 대학에서 성장이론을 강의하다 69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장관에 전격 발탁됐다.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대통령 경제특보·국무총리를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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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미얀마에서 유명한 한국인은 박정희와 이순신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제 막 민주화의 길로 시동 건 나라, 미얀마. 우리에게는 옛 국명 ‘버마’가 더 친숙하다. 그동안 몇 차례의 민주화 시위가 결실을 맺지 못한 게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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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핵무기 공개 뒤 하야하려 했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하순봉(68·사진) 경남일보 회장이 7일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81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국내 기술로 개발한 핵무기를 공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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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서 주문받은 신형 포탄, 6발째 시험하다 “쾅”
3일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의 국방과학연구소(ADD) 총포탄약시험장에서 155㎜ 곡사포탄을 시험 사격하던 중 일어난 폭발 사고는 불완전한 포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건 경위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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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자주국방 꿈꾼 박정희 … 핵 개발은 아직도 논란 중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충남 서산에서 미사일 발사실험 장면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1978년 9월 26일 충남 서산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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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커튼을 나온 대통령 비서들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의 그림자다. 커튼 뒤에서 국정을 수습하는 정권의 더듬이요, 암행어사여야 한다. 비서는 대통령의 수족이다. 잘못되어 공격받으면 대통령이 감전(感電)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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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8)
(28) 풀리지 않는 문제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맥클로이 상사는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닥터 韓, 벌컨탄은 더 이상 조사할 게 없어요. 문제는 벌컨포예요. 통일산업이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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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1.새로운 도전
72년 12월 중순 어느날 나는 청와대 오원철(吳源哲.71)경제2수석비서관의 방에서 그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레이저 무기와 야시(夜視)장비를 개발하겠다는 나의 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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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11)
(11) 새로운 도전 72년 12월 중순 어느날 나는 청와대 오원철(吳源哲·71) 경제 2수석의 방에서 그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레이저 무기와 야시(夜視) 장비를 개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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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후 수도권 대책 어떻게 바뀌었나
91년도 서울의 평균지가는 전국 평균의 1백배에 달한다. 교통난·환경오염은 더욱 말이 아니다. 서울도심의 평균주행속도는 80년 시속 30.8km이던 것이 89년엔 18.7km로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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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박정희 사후 20년만에 공개 - 국토개조개혁
박정희는 조국의 미래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고 구체적인 그랜드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대로 국가를 성공적으로 바꾸고 경영해 오다 10·26이라는 돌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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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경제위기 이렇게 이겨냈다]下.위기극복 '人事가 萬事'
73~74년 에너지위기 돌파는 하나의 전쟁이었다. 참모들은 작전을 수립했고 총사령관으로 나선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군단장.사단장에 해당하는 부처장관을 지휘했다. 승리의 요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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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경제위기 이렇게 이겨냈다]中.'위기가 기회' 정면돌파
한국 경제개발사에서 위기는 성장의 어머니였다. 파멸의 입구로만 보이던 위기 속에서 한국인은 발전으로 열려있는 돌파구를 곧잘 찾아냈다. 돌이켜보면 "그 위기가 없었더라면 이런 성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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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경제위기 이렇게 이겨냈다]上.위기관리의 핵심은 지도력
한국은 60년대초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두차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첫번째는 63~64년 외환보유고가 1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한 외환위기였다. 오일 쇼크로 불리는 73~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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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85년 원폭보유' 계획 세웠다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미국의 완강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85년 원자탄 보유를 목표로 핵무기 개발을 극비리에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朴대통령은 또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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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0·26, 고박정희대통령 18주기…18년째 '아침문안'오원철 경제2수석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씨는 요즘도 朴대통령에게 아침 일일보고를 올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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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부 - 남북 경쟁시대 막 오르다
'10월 유신(維新)'이라는 대정변을 몇달 앞둔 72년 2월 하순 어느날 오후 중앙정보부 회의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비롯한 내각.청와대비서관.공화당 간부등 정부.여당 관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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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5共정권의 과오
한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 대통령이 들어섰을 때 그가 전임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국정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모든 순리가 그러하듯 그는 전임자가 잘한 것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