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커튼을 나온 대통령 비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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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런데 요즘은 비서실이 직접 전선에 나선다. 수습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 비서실장은 간담회.외부강연으로 야당.언론을 공격한다. 이달 초엔 기자간담회에서 "(법무장관에) 왜 문재인씨를 반대하는가"라며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화살을 쏘기도 했다. 홍보수석들은 이상한 논리로 사단을 일으킨다. 어느 수석은 "박정희는 고교교장, 노무현은 대학총장"이라고 했다. 또 다른 수석은 "대통령은 21세기에 있고 국민은 아직도 독재시대의 문화에 빠져 있다"고 했다.

홍보기획 비서관은 장관도 차관도 아닌 1급이다. 그런데도 그는 공개적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 "책임감 등이 없는 5무(無)"라고 비난했다. 인사청탁 논란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국회에선 장.차관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독재정권이든 민주정권이든 청와대 비서실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현 정권 비서실의 문제는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일했다면 노출이 적어 권위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자에서 뛰쳐나와 야전(野戰) 장수처럼 칼을 휘두르다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로 권위가 다 새나가 버렸다.

권위에는 언행만큼 인사도 중요하다. 대변인은 청와대 핵심 중 핵심이다. 대통령의 입이자 청와대의 얼굴이다. 정권의 코드만 알아선 부족하다. 한국 현대사와 역대 정권의 궤적도 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베테랑 기자, 여차하면 신문사 주필과도 '맞짱 토론'할 수 있다.

그런데 현 정권은 아나운서 출신 40대 초반 여성을 초대 대변인에 앉혔다. 불안하고 민망한 3개월이 지난 후 그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고는 386이 이어갔다. 그들은 성실히 일했다. 그러나 겨우 국정을 좀 알라치면 교체되곤 했다. 며칠 전에 또 바뀌었다. 전에 했던 사람이 맡았다고는 하나 집권 3년 반 만에 벌써 여섯 번째니 자동차 엔진오일 교체 주기보다 짧다. 정권의 입이 그리 자주 바뀌니 권위가 설 리 없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집권 5년7개월 동안 3명의 대변인을 쓰고 있다. 초대 애리 플라이셔는 비서실장.정치고문과 같은 급으로 연봉을 15만 달러나 받았다. 물론 나라의 위상이 다르긴 하지만 세계가 그의 입을 주목했고, 그의 입은 부시의 권위였다. 그는 그런 권세를 누리면서도 검소하게 노총각 결혼식을 치렀다.

한국의 성장사(史)에서 청와대 비서실은 권위를 유지해 왔다. 부분적으론 월권.부패.언론 탄압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비서실은 엘리트 참모부였다. 정보부.검찰.보안사가 독재정권의 악역을 맡아주어 비서실은 그런대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집행부서도 아닌데 현장 작업을 하다 순직한 비서관도 있다. 1977년 5월 방위산업을 담당했던 오원철 경제2수석실에서는 군 연구진과 함께 전방기지 야전사격장에서 국산 벌컨포의 화력을 시험했다. 약실(藥室)에서 포탄이 잘못 터져 파편 하나가 이석표 비서관의 가슴에 박혔다. 오 전 수석은 "정부와 방위산업계는 이 비서관의 시체를 넘어 전진하자고 다졌다"고 회고한다.

엘리트 참모부의 권위는 인사의 질서에서 나왔다. 역대 청와대의 비서관은 1~3급, 행정관은 4~5급이었다. 대부분 부처에서 경력을 쌓은 이가 발탁되니 부처와 마찰이 별로 없었다. 이런 질서는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권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젊은 행정관이 3급을 달더니 초고속으로 비서관이 됐다. 김대중 정권 말기에는 급기야 42세 운동권 출신 여성이 청와대 대변인에 올랐다. 지금 노무현 정권에선 386 비서관.행정관들이 쉽게 1~3급을 달고 있다. 3급.4급에 오르기 위해 십수 년간 고생한 부처의 나이 많은 공무원들은 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