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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정치회고록>19. 5共정권의 과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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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 대통령이 들어섰을 때 그가 전임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국정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모든 순리가 그러하듯 그는 전임자가 잘한 것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잘못한 것은 고치거나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9년 10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서거한 후 신군부가 이끄는 5공 정권이 들어섰다.5공은 이런 순리를 저버렸다.농촌을 부흥시킨 새마을운동을 변질시켰고,자주국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열심히 일했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시련을 안겼다.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사무총장에 자신의 아우 전경환(全敬煥)씨를 임명했다.그는 유도를 전공한 경호관으로 청와대 본관경호팀 조장의 한 사람으로 근무했을뿐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86년 8월 全씨가 물러나기까지 6년여의 세월을 거치면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이 외화내빈(外華內貧)으로 흘렀다.朴대통령 서거후에도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그 순수성이 유지됐더라면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로 인한 농촌의 어려움도 새마을운동으로 거뜬히 극복했을 것이다.

오원철(吳源哲)씨는 71년 11월 청와대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취임한 후 8년여동안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키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그는 79년말 경제2수석실이 폐지됨에 따라 청와대를 떠났다.

吳씨는 방위산업담당 수석비서관으로 무기와 군용장비의 국산화를 적극 추진했다.그는 국산화가 우리나라 공업전체를 발전시키며 국방과학기술을 향상시키고 무엇보다 외화를 아낄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반면 군당국은 비싸긴 하지만 성능이 좋은 외국제 무기를 잠재적으로 선호했다.때문에 吳씨와 군당국 사이에 간혹 긴장이 조성되는 듯했다.吳씨는 해임되자마자 신군부세력에 끌려가 부정축재라는 부당한 혐의를 받고 모진 고초를 겪었다.그간의 실정을 잘 아는 나는 지금도 신군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의분을 금할 수 없다.

5공 신군부는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무기개발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朴대통령의 자주국방을 계승하려면 이를 뿌리쳤어야 했는데 5공은 이에 굴복했다.

5공은 국산무기개발의 중추였던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유도탄 개발분야에 대해 숙청을 단행했다.80년 8월 ADD소장이며 유도탄 개발을 총지휘한 심문택(沈汶澤)박사가 물러나야 했다.새로 취임한 소장은 주영복(周永福)국방장관의 지시라며 30여명의 간부를 해임했다.이중에는 이경서(李景瑞)부소장과 강인구(姜麟求)박사등 유도탄 개발에 크게 기여한 인사들이 포함됐다.

82년 12월말에는 대대적인 제2차 숙청이 있었다.김성진(金聖鎭.육사11기,체신부.과기처장관 역임)장군은 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ADD 총인원 2천4백여명중 8백여명을 감원해 ADD를 마비시켜 버렸다.몇년에 걸쳐 엄청난 비용을 들여 양성한 유능한 인재들이 ADD를 떠나게 된 것이다.

특히 신군부는 유도탄 연구팀을 아예 없애고 말았다.최현호박사는 K-2 유도탄의 개발책임자였다.K-2 유도탄은 미사일이 목표물에 도달할 때까지 전파로 유도하는 대신 사전에 목표물에 대한 데이터를 입력해 목표물에 명중하도록 고안된 것이다.그도 숙청대상에 포함됐다.

연구팀에는 선행연구만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선행연구란 실물은 다루지 말고 책이나 읽고 있으라는 뜻이다.이로써 우리나라의 유도탄 개발사업은 완전히 문을 닫게 됐다.78년 북한을 앞질러 세계에서 일곱번째 유도탄개발국이 됐던 우리나라는 지금 북한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다.

朴대통령이 서거하자 70년대 朴대통령이 주력했던 중화학공업이 과잉 투자된 것이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요인의 하나가 된다는 시비가 일어났다.공장을 지어본 경험도 없는 신군부의 국보위위원들은 중화학공업의 생리도 모르면서 중화학공업의 조정을 들고 나왔다.상공부에서도 중화학공업 건설담당자들이 타의에 의해 떠나게 됐다.중화학공업 조정은 성과도 없이 2~3년간 혼미를 거듭해 국가경제에 주름살을 끼쳤다.

중화학공업의 투자에는 그럴만한 사정과 목표가 있었다.70년대 한국으로서는 방위산업과 그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되도록 빠른 시일안에 건설하는 것이 국가안보상 절대적인 명제였다.

중화학공업은 적어도 10년 또는 20년 앞을 내다보는 것이므로 준공후 일정기간 공장시설의 일부가 가동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50,60년대 일본도 중화학공업의 일시적 과잉투자가 있었고 그때마다 일본은 중화학제품의 과감한 수출로 이를 극복해냈다.우리도 수출로 이에 대처할 방침이었다.또 고도성장을 추구했으므로 인플레의 압력은 항상 있었다.유발된 인플레는 방위산업만 완성되면 강력한 안정정책으로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80년대 후반 국제적인 3저(低)호황에서 고도성장과 흑자경제가 가능했던 것은 5공이 비판했던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주력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정리=김진 기자

◇이 회고록은 20회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회고록은 제1회부터 중앙일보 인터넷신문(주소:www.joongang.co.kr)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지금까지 실린 회고록에 대한 독자여러분의 의견을 환영합니다.팩스 02-751-5372.

<사진설명>

78년 박정희 대통령이 역대 경호실작전차장보를 지낸 전두환(朴대통령 바로 오른쪽,얼굴이 가려져 있음).노태우전대통령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한나라의 대통령과 차례로 권력을 이어받을 후임자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른채 한자리에 모인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김정렴씨는 후임자들이 朴대통령의 업적을 축소하고 잘못을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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