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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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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현대사에서 청와대는 정권의 중심이었다. 청와대가 바로 서면 정권이 살고 흔들리면 정권이 죽었다. 박근혜의 청와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박근혜는 정권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박정희 청와대는 살고 죽는 걸 다 겪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청와대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신념이 충만하고 기강이 시퍼렜다. 당시 청와대 수문장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다. 그가 기록한 9년2개월은 역대 최장수다. 다른 나라에서도 드물다.

 그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건 기강이었다. 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청와대 비서실을 빙자하는 소지를 줄이려는 조치를 취했다. 모든 직원에게 청와대 근무를 표시하는 명함의 작성과 사용을 금지시켰다. 위반했을 때는 같이 일할 수 없다는 확고한 뜻을 시달했다.”

 70년대 청와대는 국가 건설의 전쟁 사령부였다. 중화학 공업, 방위산업,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 심장부였다. 업무는 전투였고 비서관은 야전 전투부대장이었다. 실제로 비서관이 순직하기도 했다.

 77년 5월 전방 지역 무기시험장. 국산 벌컨포를 사격하는데 잘 나가던 포탄이 갑자기 멈췄다. 약실(藥室)을 여는 순간 뒤에 서 있던 방위산업담당 이석표 비서관이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유탄을 맞은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통에 잠겼다. 오원철 경제수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전우의 시체를 넘고 전진하겠습니다.”

 78년 12월 김정렴 실장은 떠났고 김계원 체제가 들어섰다. 비서실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눌렸다. 차 실장과 김재규 정보부장이 암투를 벌여도 비서실장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권 관리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10개월 후 대통령은 정보부장의 총탄을 맞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청와대는 점점 권위와 도덕성을 잃어갔다. 전두환 청와대는 5공 압제의 사령부였다. 노태우 청와대에서는 박철언 특보와 김종인 경제수석이 뇌물로 감옥에 갔다. 김영삼 청와대는 홍인길 총무수석이 한보그룹 로비에 걸려들었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한광옥·박지원 등 아예 비서실장이 감옥에 갔다.

 노무현 청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규 민정수석이 박연차 회장에게서 1억원의 상품권을 받아 구속됐다. 이명박 청와대에선 비서관들이 로비스트와 어울리다 검찰에 불려갔다.

 부패뿐이 아니다. 무능과 권위 부족도 심각한 문제다. 청와대 홍보수석이나 대변인이라면 정권의 개혁 이론가다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신문사 논설위원들과 만찬을 하면서 토론으로 공방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정권의 철학과 대통령의 생각을 당당하게 이론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공으로 무장해야 한다. 역대 정권의 역사와 인물을 훤히 꿰뚫고 한국과 세계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관행이 없어졌다. 경력과 역량이 부족한 인물들이 홍보수석과 대변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대통령의 비서였다고, 대통령을 도왔던 386 투쟁가라고, 그리고 그저 대통령이 편하게 생각한다고 그 이론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정권이 언론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윤창중 사건은 청와대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전투 같은 대통령 해외 순방에 인턴 여학생과 술을 마시는 대변인, 술에 취해 새벽에 호텔을 배회하는 대변인, 피의자를 서울로 빼돌리고 거짓말하는 홍보수석, 국민 앞에 서서 느닷없이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홍보수석, 서로 손가락질을 하는 대변인과 홍보수석….

 대한민국처럼 위대한 나라의 청와대가 어쩌다 이런 모양이 됐나. 이 나라에는 이렇게도 인물이 없는가. 대통령은 도대체 인물을 보는 눈이 있는가 없는가. 이 나라는 89세 김정렴을 다시 불러야 하는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