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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2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28) 풀리지 않는 문제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맥클로이 상사는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닥터 韓, 벌컨탄은 더 이상 조사할 게 없어요. 문제는 벌컨포예요. 통일산업이나 대우정밀이 얼마나 형편없는 벌컨포를 만들었는지 알아요□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

한마디로 풍산금속이 미 공군의 탄약 공급회사(오린社)로부터 제조기술과 장비.재료 등을 제공받아 만든 벌컨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국산 벌컨탄은 장소만 한국에서 생산했지 실제는 미국제나 다름없었다.

결국 맥클로이는 국산 벌컨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주 원인은 벌컨포의 성능이 나쁘기 때문이라며 국방과학연구소(ADD) 탄약개발부장인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나는 맥클로이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 친구는 거의 매일같이 내 방에 들러 "해답은 명확하다" 며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라" 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또 그는 미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소문처럼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날카롭게 살폈다.

나는 맥클로이가 뭐라든 개의치 않고 ADD 연구원들에게 국산 벌컨포와 벌컨탄 중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지를 철저히 조사토록 했다.

특히 벌컨탄의 경우 ADD 탄약개발부 선임연구원인 소광섭(蘇光燮.55.서울대 물리교육과 교수)박사의 책임아래 풍산금속에서 성능시험을 반복했다.

이와 함께 맹선재(孟琁在.68.한양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재료시험실장에게 의뢰해 벌컨탄의 뇌관재질에 문제가 없는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孟박사가 경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KIST 재료시험실에 5백만원을 맡겨놓았다.

본격 작업에 착수한지 일주일 후인 77년 6월 중순, 오원철(吳源哲.72) 대통령 경제2수석으로부터 청와대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서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吳수석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韓박사는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풍속금속에 가서 아예 살라구. 거기서 국산 시험탄을 자꾸 만들어 내는 거야. 그걸 갖고 일선 부대에 가서 계속 성능실험을 하라구. 성공할 때까지 말이야. "

사실 국산 벌컨포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실무책임은 내가 맡았지만 총괄 지휘는 吳수석이 했다.

방위산업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吳수석의 지시대로 풍산금속에 야전용 침대를 갖다 놓고 밤샘을 해가며 현장을 독려했다.

당시 근본 문제는 국산 벌컨포에 국산 벌컨탄을 사용하면 포(砲)의 노리쇠가 파손되는 등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현상을 '악(惡)작용'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국산 벌컨포에 미제 벌컨탄을 사용하거나, 미제 벌컨포에 국산 벌컨탄을 쓰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찾아 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마치 미궁(迷宮)에 빠진 살인사건에서 범인을 밝혀내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풍산금속에서 성능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시험탄을 만들어 내면 그것을 일선부대로 가져가 실험을 하곤 했다.

그러던 77년 7월 하순 어느날이었다. 이 날은 여느 때와 달리 이석표(李奭杓.작고) 대통령 경제비서관이 포 실험 현장에 나와 있었다. 李비서관은 오원철 경제2수석 밑에서 방위산업을 담당했다.

그동안의 진행상황이 궁금해 모처럼 현장을 찾은 것이었으리라. 나는 이날 만큼은 포 실험이 제발 성공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윽고 포병들이 국산 벌컨포에 국산 벌컨탄을 장착한 후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포병장교가 발사명령을 내렸다. 정말이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포탄은 마치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간에서 그만 '탁!' 하고 서 버리는 것이었다. 악작용이 발생하면 포 내부에서 회전하던 포탄이 중간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멈추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李비서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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