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악축제'는 축제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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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는 과연 페스티벌인가. 아니면 일정 기간에 같은 장소에서 전국에 있는 교향악단들이 '우연히'모여 연주하는 음악회 시리즈에 불과한가.

'국내 최고, 최대의 음악축제'를 자랑하는 '2007 교향악 축제'가 1일 개막해 23일까지 열리고 있다. 한달 가까이 전국 21개 교향악단이 참가하는 음악제이니'국내 최대의 음악 축제'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다. 교향악단 1개당 출연진을 80명만 계산하더라도 총 1680명이 참가하는 셈이다. 하지만 '국내 최고(最高)'라는 표현은 문제가 많다. 축제, 즉 음악제라면 갖춰야 할 기본 요건을 전혀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예술의전당 음악당 개관 1주년을 기해 막을 올린 교향악 축제는 내년이면 20회를 맞는다. 20년 가까이 된 음악제가 타성에 젖어 매년 그렇고 그런 연례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향악 축제'에는 '교향악'은 있을지 몰라도 '축제'는 없다. 음악제를 축제답게 만드는'주제(테마)'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해마다 캐치 프레이즈인지 테마인지 불확실한 문구를 내세워왔다. '명곡의 향연'(2001년)'멘델스존 to 쇼스타코비치'(2002년)'세계를 질주하는 예비 거장들'(2003년)'교향악, 그 웅장함을 노래하자'(2004년)'교향악, 그 하나됨을 위하여'(2005년)'교향악 축제 18년, 한국 교향악의 현재와 미래'(2006년)'희망의 봄'(2007년) 등이다.

'명곡의 향연'은 어떤 음악회에 갖다 붙여도 어울릴 법한 '두루뭉실한'표현이다. '세계를 질주하는 예비 거장들'도 마찬가지다. 교향악 축제의 협연자 중 절반 이상을 신예 연주자로 기용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04년, 2005년의 테마는 또 어떤가. 교향악이란 본디 여러 악기가 모여'웅장함''하나됨'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냥 '교향악 축제'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올해의 테마인 '희망의 봄'도 그렇다. 교향악 축제는 매년 봄에 열리는 것이고 봄은 희망의 계절이니 이 또한 '교향악 축제'의 다른 표현이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음악제(music festival)'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특정 장소에서 열리는 일련의 연주회로 가령 국민악파, 현대음악, 또는 특정 작곡가의 작품 등 통일된 주제(테마)에서 영감을 얻어 결정한 레퍼토리를 연주한다."

그렇다면 음악제의 테마란 어떤 것인가. 외국 음악제의 경우를 살펴 보자. 핀란드에서 열리는 실내악 축제인 쿠모 페스티벌은 올해 테마를 '여행'으로 잡고 슈베르트.브람스의 작품을 집중 연주하기로 했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총감독을 맡고 있는 '미팅 포인트 인 벳부'(벳부 아르헤리치 음악제)의 올해 테마는 '음악과 스토리'다. 아르헤리치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동화책을 많이 읽어준 것이 예술적 상상력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체험을 기초로 정한 것이다. 올해 연주될 대표작은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다. 2005년의 주제는'러시아', 2006년의 주제는'남미'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클래식 음악제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런던'BBC 프롬스 축제'는 또 어떤가. 두 달 동안 열리는 음악제인 만큼 주제는 두 세 개로 늘어나기도 한다. 2005 프롬스 축제의 주제는 '바다''동화와 음악'이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 승리 200주년과 드뷔시의 교향시'바다'가 완성된지 100주년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동화와 음악'이라는 주제도 곁들였다.

2004 프롬스 축제의 테마는 '동양이 서양음악에 미친 영향''영국 작곡가 엘가, 델리우스, 홀스트 서거 70주기, 버트위슬, 맥스웰 데이비스 70회 생일 기념'이었다. 2002년 프롬스 축제의 주제는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구약성서'였다. 월튼'벨사살의 향연', 본 윌리엄스'욥: 춤을 위한 가면', 닐센'사울과 다윗'등이 연주됐다.

2001년의 주제는'전원(pastoral)'이었다. 영국 농촌 풍경에 영감을 받은 음악 작품들이 연주되었고 농업이 환경 파괴에 미친 영향을 고발한 샐리 비니시의 신작'마디풀의 비가(悲歌)'(Knotgrass Elegy)을 위촉 초연했다. 전원을 노래한 아이브스의 'Three Places in New England', 드뷔시의 '다프니스와 클로에'도 연주됐다.

스위스의 루체른 여름 음악제는 오케스트라 위주로 프로그램을 꾸민다는 점에서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와 비슷하다. 루체른 음악제의 테마는 '변용'(2000년)'천지창조'(Creation. 2001년)'유혹'(2002년)'ICH'(나. 2003년)'자유'(2004년)'새로운 선구자들'(2005년)'언어'(2006년)'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기원'(2007년) 등이다.

2002년 '유혹'이라는 테마 속에 '사랑, 춤, 그리고 정열''동양'이라는 두 개의 부주제를 담았다. 언뜻 R 슈트라우스의'살로메'가 떠오른다. 2005년에는 '새로운 선구자들'이라는 테마에 걸맞게 스위스 현대음악을 집중 연주했고 초연작만 15개나 되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나 액상 프로방스 음악제처럼 처음부터 모차르트 전문 페스티벌을 표방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해마다 새로운'테마'를 정해서 그에 맞게 레퍼토리를 구성해야 한다. '테마'는 음악제의 핵심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예술작품'이다.

'Fluxus'(유동)'Rencontre'(만남) 등 윤이상의 작품 제목으로 테마를 대신하는 통영국제음악제도 테마가 없긴 마찬가지다. 대관령음악제는 적어도 테마 선정에서는 모범적이다. '자연의 영감'(1회)'전쟁과 평화'(2회)'평창의 사계'(3회)를 주제로 내세웠다.

교향악 축제에 어울리는 테마는 없을까. '파우스트'나 '셰익스피어'는 어떨까. '제2차 세계대전''혁명''바다''러시아'도 잘 어울린다. '교향악, 그 웅장함을 위하여'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테마'가 정해져야 매년 그렇고 그런 스탠더드 레퍼토리의 반복에서 탈피할 수 있고 축제성을 회복할 수 있다. 개별 이벤트를 단단한 응집력으로 묶어주는 테마 없는 축제는 더 이상 축제가 아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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