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킬러 변호사, 타결 순간까지 한국 자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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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2일 오후 4시 서울 하얏트 호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타결을 선언했다. 한국 측 협상단은 자축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 함께 기뻐하는 파란 눈의 이방인들이 있었다. 미국 워싱턴의 유명 로펌 '샌들러 트래비스 & 로젠버그(ST&R)'에 소속된 미국인 변호사 두 명이 그들이다. 두 변호사는 이번 막판 협상 1주일 동안 하얏트호텔에 상주하며 한국 협상단을 지원했다. 각종 협상 전략과 협정문안 초안을 잡는 데 법률적 자문을 했다.

협상단의 한 관계자는 "각종 국제 통상협상에 참가한 경험이 많은 50대의 노련한 '킬러 변호사(Killer lawyer)'급"이라며 "시간당 500달러 수준의 특급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두 변호사는 미 무역대표부(USTR) 간부 출신들로 미국 협상단의 내부 사정에도 훤해 우리 측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 국경 없는 법률 시장=변호사들에게 이미 국경은 사라졌다. 한국 정부는 이번에 미국과 싸우기 위해 미국 변호사를 고용했다. 앞으로 법률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미국 정부가 한국 변호사를 쓰는 정반대 현상도 예상할 수 있다. 로펌과 변호사들의 국제적 무한경쟁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번 협상을 위해 ST&R 외에 '스텝토 & 존슨(S&J)' 소속 미국인 변호사 3명 등 모두 7명을 선임했다. ST&R은 로펌과 별도로 전직 USTR 관리 등을 영입해 통상자문 회사를 두고 있다. 통상 자문뿐 아니라 관세유형 분석, 수입품목 적정가 산정, 호혜조약 활용 등의 업무를 세분화.전문화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S&J는 국제통상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로펌으로 미 국무부.법무부.재무부 등에서 일했던 변호사들이 포진해 있다.

◆ "글로벌 메가 로펌 상륙"=미국 로펌은 세계 법률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영국 법률전문지 더 로이어에 따르면 세계 100대 로펌 가운데 미국계가 76개에 달한다.

이 중 세계 시장 공략에 가장 먼저 나선 곳은 '베이커 & 매켄지'. 우리나라에서도 국내 로펌과 제휴 형식으로 법률자문을 하고 있다. 현재 3246명의 변호사가 38개국, 70개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세계 유수 기업 가운데 베이커 & 매켄지의 법률자문을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지난해 매출액은 15억 달러에 이른다.

기업 인수합병(M&A)으로 유명한 '스캐든 압스'도 세계 시장 공략에 적극적이다. 외환은행 인수전에서 론스타를 대리해 국내에서도 알려졌다. 엘리엇 스피처 뉴욕주 주지사가 이곳 출신이다. 매출액 규모로 미국 최대 로펌이다. 이 밖에 '와이트 & 케이스' '클리어리 고틀립' '설리번 & 크롬웰' 등 메가톤급 로펌들도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미국 로펌들은 초특급 '스페셜 스페셜리스트' 변호사들을 앞세워 연간 1조3000억원대의 한국 법률시장 공략에 나설 준비를 마친 상태다.

한국외대 문재완(법학) 교수는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인 점을 고려하면 미국 로펌으로선 매력있는 시장임에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문 교수는 "법률시장 개방으로 미국 로펌들이 국내에 사무소를 차리고 한국 변호사까지 고용해 미국법과 한국법을 모두 자문하게 되면 한국 대기업들이 국내 로펌을 이용할 이유가 줄어들게 된다"고 강조했다.

◆ 독일은 초토화, 일본은 선방=독일은 1999년 법률시장 개방 이후 영.미계 로펌들이 밀려들어 평정한 대표적인 사례다. 현재 독일 10대 로펌 가운데 '헨겔러 뮐러'와 '글라이스 루츠' 두 곳만 순수 독일 로펌이다. 나머지는 영.미계 로펌에 합병됐다.

일본은 아직까진 선방하고 있다. 87년 외국법 자문업무에 한해 법률시장을 개방한 일본은 94년 일본 로펌과 제한적 동업을 허용했고 2005년 4월 전면개방을 했다. 18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한 덕분에 일본의 대형로펌은 1위부터 5위까지 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국 로펌의 집중 공략 대상은 주로 중.하위 로펌들로 6~20위 사이 로펌 가운데 절반 정도가 영.미계 로펌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갔다.

◆ 한국계 미국변호사 뜬다=미국 로펌 클리어리 고틀립은 올 초 3조4000억원짜리 롯데쇼핑의 한국.런던 동시 상장을 성사시켰다. 공모금액이 국내 민간기업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 과정에서 업무를 선점하고 주도한 인물은 이 로펌 소속 한국계 변호사들이다. 홍콩사무소의 최재훈.한진덕 변호사, 뉴욕사무소의 한상진 변호사였다. 클리어리 고틀립은 한국법무팀을 따로 두고 한국 시장 공략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계 변호사들은 영어와 미국법에 정통할 뿐 아니라 한국 문화와 기업 정보에도 밝아 미국 로펌과 한국 기업이 선호하고 있다. 현재 홍콩에서 한국 업무를 맡고 있는 미국 로펌 소속 한국계 변호사는 130여 명이다.

박성우 기자

◆ 킬러 변호사=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사회적 이목을 끄는 거액의 사건에서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 미 경제지 .포브스.가 2001년 5월 OJ심슨 사건 등을 맡았던 변호사들을 지칭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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