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정착을 위한 현장점검(1)|폭력·에로물 범람…명작은 "낮잠"|현황·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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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주택가에 잡화점만큼이나 수가 많아진 비디오 대여 점에서 빌려 온 온갖 비디오 프로그램들이 안방을 뒤덮고 있다. 비디오는 한가한 킬링 타임용에서 벗어나 일상사에서 우리의 의식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TV가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대중 매체라면 비디오는 그 이후를 물려받으려 하고 있다. 최근 폭증하는 비디오는 같은 대중영상매체이면서도 그 원류인 영화나 TV에 비해 개인적이고 때론 음성적이어서 그만큼 더 강력하고 다양한 차원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남녀노소 개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며 그에 따른 현대 소비사회의 문화를 양산하는 비디오문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절실한 때다. 비디오문화의 현황과 여러 파행적인 양태 등 비디오문화전반을 점검하는 시리즈를 통해 보다 발전적이고 건강한 비디오문화를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현황>
공연윤리 위에 따르며 한해 심의되는 비디오 물은 90년 6천9백여 편, 91년 5천3백여 편으로 한해 극장 개봉용으로 심의 받는 영화의수(90년 5백26편, 91년 4백93편)보다 10배를 훨씬 넘고 있고 TV방송용 영화(91년 3천여 편)보다 몇 배 더 쏟아지고 있다. 비디오 대여 점은 전국적으로 3만 곳이 넘고 끊임없이 늘고 있다. 지난해 최대 히트프로인 『다이하드2』『사람과 영혼』『터미네이터2』등은 10만개 이상 판매됐다. 극장에서도 크게 인기를 모은 이들 프로들은 10번만 대여됐어도 시청자가 수백만 명이 된다. 비디오 시장은 전세계적으로 영화 시장의 규모를 뛰어넘어 2차적 소비물인 비디오에 의해 원천적 생산물인 영화가 떠 받쳐지고 있다. 우리의 경우도 비디오 시장은 2천억 원 규모의 영화시장에 비해 비디오가 총매출액 3천억 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비디오제작사가 입도선매를 위해 영화제작비의 반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한 대기업 전자회사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가정용 VCR는 93년에 전 가정의 90%가 보유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일찌감치 계열사를 통해 비디오 사업에 뛰어들어 시장을 장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을 공급하는 대기업 계열의 제작 사와 직배사의 경우 91년 매출액이 89년의 10배로 뛰어오르는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원래 음반산업과 마찬가지로 중소기업 고유업종이었던 비디오 제작 업은 어느새 국내 최대의 대기업 계열사들이 장악하고 있다. 비디오의 양적 팽창은 폭발적이며 아무도 예기치 못한 현상을 속속 빚고 있다.

<문제점>
비디오 하면 으레 킬링 타임용의 질 낮은 영화만이 대부분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이는 근원적으로 비디오가 대중화되던 80년대 초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작품들을 비디오로 시판하는 것을 꺼려 음성적인 포르노 비디오만이 다량 유통되었던 데에 원인이 있다. 우리의 경우 해적판 음반을 만들고 팔던 업자들이 이 당시 대거 비디오 쪽에 진출하는 바람에 폭발하는 시장수요에 비해 질 좋은 프로그램의 공급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비디오의 제작은 영화 제작보다 출판·음반제작과 유사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질적인 내용은 생산자들의 입장에서보다 철저하게 상업적인 이윤추구 구조에 의해 곧잘 간과된다. 인기 있는 작품이면 시골 외딴 구멍가게나 달동네 잡화점에서도 비디오로 빌려 볼 수 있으며 아무리 명작중의 명작이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제작 사 창고에만 쌓여 있게 된다. 그 주요원인은 약간 인기 없는 작품이면 곧 반품하고 마는 도·소매상의 전근대적인 관행에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80년대 전반까지 해적판 포르노와 심의 통과한 준 포르노 작품들이 비디오의 대종을 이루었고 폭력적인 홍콩의 액션물과 TV시리즈 물, 제작자도 알쏭달쏭한 쓰레기 같은 작품들이 명작들보다 앞서서 팽배하게 됐다.
비디오가 이 땅에 들어 온지 10년이 되는 91년 초까지 SKC를 제외한 모든 비디오 프로들이 하이파이 스테레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제작자나 시청자가 비디오의 내용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비디오 복제장비의 낙후성으로 화질이나 음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그동안 비디오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 등지에서 급속히 발달하고 있는 음악비디오는 아무런 성장을 할 수 없었고 이와 함께 다큐멘터리·교육용 기획 물 등 다양한 장르의 비디오 프로그램들이 발전하지 못하고 외화만이 판을 치고 있다.
88년 영화시장 개방이후 폭증한 외국 극영화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나온 전체 비디오(1만2천88편)의 75%(9천1백69편)를 차지하고 있다(한국영상음반판매자 협회자료). 그것도 미국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인 MGM·콜롬비아·워너브러더스·20세기 폭스·파라마운트·유니버설 사 등의 작품들이 비디오 대여점 진열대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수많은 홍콩의 폭력물과 일본의 만화 물에 빠져들고 있다.
이에 비해 극장이나 TV에서 볼 수 없고 비디오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옥같은 작품들은 제작자·배급업자·소매업자들의 무의식적인 상업주의 때문에 사장되고 있다. 일례로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과 가장 많은 판권을 계약하고 있는 우일 영상의 자료실에는 비평가들이 극찬해마지 않는 명작들이 수없이 쌓여 있으나 우리 비디오 문화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TV영화에서도 여러 편 방송돼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수많은 명작 중 비디오로 나온 것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하나뿐이고 신화적인 코미디의대가 우디 앨런의 것도『한나와세 자매들(Hannah and Her Sisters)』밖에 없다. 미국·일본에서는 24시간 편의점에서도 구해 볼 수 있는 전설적인 오슨웰스의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비디오로 빌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 예술영화의 맹장인 장 뤼크 고다르의 작품도『경멸(Le Mepris)』하나만이 나왔다고는 하나 좀처럼 비디오 점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좋은 작품이라는 비디오를 집 근처 비디오 점에서 찾아보려 하면 폭력·에로물에 막혀 만날 수 없다.
비디오의 대중적 수요에 제작자·공급자들이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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