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재활용 처리장으로 가는 연구 성과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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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조동호 교수는 20여 년째 작은 캐비닛만 한 '보물'을 보관해 오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80년대 중반 8년여의 연구 끝에 국내 처음으로 자신이 주도해 직접 개발한 데이터통신 장비다. 지금은 전기를 꽂지도, 겉모습이 화려하지도 않은 구식 장비지만 우리나라 통신사로 보나 개인의 연구개발 역사로 보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 나름대로의 보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직장이나 연구실을 옮길 때마다 가장 먼저 챙기고 혹시나 흠집이 날까 각별히 살핀다. 물론 비좁은 연구실이지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 둔다.

한국의 통신 발달사를 지켜본 기자로서 조 교수의 애정이 과학기술 유물 하나를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가 은퇴해도 그 커다란 '짐'이 보물 대접을 받으며 그의 아파트로 옮겨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큰 창고가 없는 아파트 문화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서는 이런 보물이 꽤 나온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연간 10조원에 육박하고, 민간기업 연구개발비까지 합하면 올해 33조원에 이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지 않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다. 대학과 공공연구소 등은 이런 거액을 받아 수많은 연구 성과를 쏟아내고 있다. 세계 최초니, 국내 처음이니 하는 것도 꽤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느 대학이나 공공연구소를 가도 연구 성과물을 잘 관리해 보관해 두는 곳은 찾기 어렵다.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대학은 많아도 현대 과학기술 유물이나 성과물을 챙기지는 않는다. 50~60년대 그려진 유화 한 점은 몇억~몇십억원을 호가하지만 그 당시 유명한 과학자의 연구 성과물이 어느 곳에 뒹굴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이 연구에 썼던 비커나 실험 기기가 보관돼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지금 대학이나 공공연구소의 재활용 쓰레기장에는 실험실에서 뜯겨져 나온 실험 기기와 주인 없는 연구 성과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고철로, 부서진 유리 조각으로, 나무 조각으로 버려지고 있다. 재활용품 수거업자들은 커다란 기계 집게로 한 움큼씩 집어 트럭에 싣고 고물상으로 가져간다. 그 속에는 한국의 공업화를 이끈 발명품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의 전통 무쇠를 복원하기 위해 썼던 주조물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연구실은 비좁고, 해마다 새로운 것은 수없이 발명되고 있으니 용도 폐기된 옛날 것은 밀리다 못해 결국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연구 성과물 중 조 교수의 것처럼 비좁더라도 연구실에 보관되는 것은 행운이다.

국립과학관에도 과학기술 유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선조가 만든 골동품 가치가 있는 과학기술 유물들은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사설 박물관에 비치돼 있다. 그렇다고 현대 과학기술 발명품을 보관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유물이나 발명품을 보여 줄 게 거의 없다. 국립과학관은 차라리 '과학 놀이터'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경기도 과천에 건설 중인 국립중앙과학관에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독일 뮌헨의 '독일 박물관'을 봤을 때 우리나라 과학관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독일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과학기술 박물관답게 수많은 과학기술 관련 골동품을 비롯한 근.현대 발명품이 전시돼 있다. 물론 만져보고 작동해 볼 수 있는 것도 적절히 배치해 놓아 과학기술의 원리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1909년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엔진비행기, 터널을 뚫는 기계와 그 현장을 옮겨 놓은 듯 만든 전시물도 있다. 전시장을 돌아보면 독일을 비롯한 세계 과학기술의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관람객들은 외국인이든 독일인이든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과학의 원리를 배우게 한다는 명목으로 관람객이 작동해 볼 수 있는 전시물이나 모조 전시물을 전시해 놓아서는 그런 감탄사는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 과학자 중 노벨상을 타지 말란 법이 있는가. 독일 박물관 같은 과학 박물관을 짓지 말란 법이 있는가.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고서야, 과학 박물관을 지으려 계획하고서야 재활용 쓰레기처리장에서 과학자의 연구 성과물이나 연구 기자재를 찾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겠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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