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시인 이근배|이규보의『동명왕 편』숨쉬는 강화 진강산 사가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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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 한 사람의 시인으로 하여 고려왕조 5백년은 그 빛이 하늘에 닿는다. 이 한 사람의 시인으로 이 나라 5천년 역사는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비록 우리의 글이 생겨나기 이전이었지만 백운거사 이규보의 저 장강대해의 시가 있었기에 우리 겨레는 오늘 토록 마르지 않는 시의 샘물을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저 하늘의 별도 따르지 못할 천재시인이며 위대한 문호인 이규보를 만나려면 강화 땅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고려가 왕도를 강화로 옮겼을 때 문하시낭평장사 라는 종 2품의 높은 관직에 올랐던 그는 왕도 수복을 못 본채 거기에서 임종했다.
이규보는 고려 의종22년(1168년) 황려현(경기도 여주)에서 호부낭중의 낮은 벼슬을 하는 이윤수의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 이름은 인저(인씨)였고 자는 춘경이었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긴 나머지 스스로 삼혹호 선생으로 호를 지었고 흰 구름을 사모하여 백운거사를 즐겨 썼다.

<술-거문고 벗삼아>
생후 몇 개월만에 심한 병을 앓아 폐인이 될 뻔했으나 소생해서 이미 아홉 살에 신동이라 불릴 만큼 남다른 글재주를 보였었다. 14세에 당시 명문 사학의 하나인 성명 재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각촉점운부시(각촉점운부시-초에 금을 긋고 타 들어가기 전에 시를 짓는 대회)에서 연속 장원을 하여 그의 문 재를 아낌없이 발휘하였다.
그런데 남보다 앞서리라 던 예상과는 달리 과거에는 운이 따르지 않아 l6, 18, 20세에 사마시에 거듭 낙방했는데 이는 그의 조숙함과 학자적 기질보다는 시인 적 자유분방함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22세 때에서야 비로소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를 했는데 규보라는 이름은 이때 지은 것으로 규성(글별)이 장원급제할 것을 알려(보)주었다고 해서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24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천마 산에 들어가 시에 몰두하면서 백운거사로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흰 구름은 내가 사모하는 바이다. …. 덕이 저 빛과 같으매 저를 사모하는 것 같이 배우고 세상에 나아가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경지에서 구름이 내가 되고 내가 구름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될 때 옛사람이 얻는 바를 얻지 않겠는가. 산에 살거나 집에 살거나 도를 즐기는 사람을 거사라 할수 있는데 나는 집에 살면서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가 백운거사로 호를 짓는데 따른 이 설명에서 당시 그가 처한 상황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엿보게 된다. 그가 장편 대숙사시「동명왕 편」을 지은 것은 26세 때 일이요, 「백운」의 시 정신이 마침내 불을 뿜어내는 일이었다.
『계축 년 4월에 「구 삼국 사」를 얻어서 동명왕의 본 기를 보니 그 신 이한 자취가 세상예서 말하는 것 이상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고 허깨비나 도깨비의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세 번을 탐독하니 그 근원이 허깨비가 아니 요, 성이며 도깨비가 아니고 신임을 알게 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을 황탄무계한 괴력 난 신으로만 일러 오는 것에 회의를 품다가 개국설화의 장엄한 뜻을 서사시로 1백41행이나 펼쳐 고려인(한국인)의 역사적 당위성과 위대한 힘을 긍지로 느끼게 해준다.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산맥이 보이지 않고
수천의 사람소리가
나무 베는 소리 같았다
임금은 말했다
하늘이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성을 쌓으라 한다
홀연히 안개구름이 걷히더니
궁궐이 높이 솟아올랐다.
이렇듯 우리네 자랑스러운 역사를 시로 쓰고자 한 것도 이규보요, 광채 나는 시로 역사를 노래한 것도 이규보였다. 그가 탁월한 시재를 품고 있으면서 관운이 없었던 것은 오히려 그를 대문호로의 길을 열어 놓게 했지만 그자신의 삶은 넉넉하고 충족 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32세 때 말직 얻어>
그는 30대 초반까지 자연과 벗하며 그의 시 혼을 불태우는데 전념한다. 32세 되던 신종2년(1199년)5월, 아우 충수 마저 숙청하고 만 적의 반란을 진압하여 무신으로써 절대권력을 잡은 최충헌의 집에 부름을 받는다.
당대 최고의 시인들인 이인노·함순·이담지 등과 함께 꽃놀이에 불려 간 그는 최충헌으로부터 시 재를 인정받아 32세 때 비로소 전주목사록겸 장서 기라는 말직을 얻게 된다. 과거에 급제한 뒤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 관리와 의견이 안 맞아 곧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 있다가 경주에서 운문산 적 당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원해서 참전했으나 논공행상에 빠지고 만다. 그는 38세 때 상국 최선에게 벼슬을 구하는 글을 올린다.
이규보가 이렇듯 벼슬을 구걸하는 글을 쓴 것은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그의 오랜 칩거생활로 궁핍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생활방편을 얻자는 것이요,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현실에 펴 보고 싶은 유사로서의 나아갈 길을 찾고자 함이었다.
최선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40세에 뒤늦게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이 새로 정자를 짓고 당대 일류문사인 이인노·이원노·이윤보 등과 이규보에게 「기」를 짓게 하고 재상 금 의를 시켜 가장 잘된 글을 뽑게 한 결과 이규보의 글이 뽑혀 정자에 걸리게 된 것이다.
당대 제1의 문장과 당대최고의 권력자가 손을 잡는 순간이었으니 그로부터 이규보의 벼슬길은 탄탄대로가 된다. 곧 권보직 한림원에 제수 되었고 이어서 그의 품계는 일취월장한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서도 한시도 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산을 만나면 산, 물을 만나면 물, 사람을 만나면 사람. 일을 만나면 일을 썼다.
소를 때리지 마라
소가 가엾지 않으냐
비록 네 소일 망정
소를 때려서는 안 된다
소가 네게 무슨 짐이 된다고
도리어 소를 나무라느냐.
「막태우행」이라는 이 시는 소와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힘없는 백성과 탐관오리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민중의 삶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그의 시 세계와 시정신을 읽게 하는 작품이다.
63세 때 그는 사소한 일로 위도에 유배된다. 그러나 복직되어 오세 되던 해 9월, 새로 도읍이 된 이곳 강화에 와서 유수중군지병마사가 된다. 고종24년 그는 69세로 30년 전 벼슬을 구걸하던 것과는 달리「걸퇴표」를 올려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한다.

<고종의 총애 받아>
「향리로 물러가게 해주시면 고기가 마음껏 헤엄쳐 놀 것이 오며 새가 제집에 돌아와 잠시 쉴 수 있을 것이옵니다」고. 그러나 고종은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고 70세에 그는 문하시낭평장사 라는 재상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해에「팔만대장경」의 판각에 붙이는「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짓기도 한다.
고종28년(1241년)9월2일 그는 몸져누운 자리에서 세상을 떴고 그해 12월6일 여기 강화의 진강산 기슭에 임금의 명으로 장사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동국리상국집』총 53권과『백운소설』이 있다.『동국리상국집』에 수록된 시·사·부만 해도 2천77수나 되니 그의 이 시 작업을 어느 누가 견줄 수 있으랴. 또한 『백운소설』은 시 이론서로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명석한 밝힘은 오히려 빛을 더한다.
그의 시어는 항상 새로 뒀고 시 형식 또한 얽매이지 않았으며 소재는 광범위하고 주제는 항상 명료하였다. 최 자는 말했다. 『그의 시는 일월과 같아서 이루 다 칭송할 수가 없다』고. 서거정은『동방의 시 문호는 한 사람뿐』이라고 서슴없이 치켜들었다.
1967년에 와서야 후손들이 여기 묘소 아래에 터를 잡아 유영각 등 재실을 짓고 문학비 등 이 잇따라 세워졌다. 사가 재는 원래 개성의 서쪽 교외에 있던 이규보 아버지가 살던 별채인데 이규보가 시를 지으면서 사가를 붙였다.
「밭이 있으니 먹을 수 있고 뽕나무가 있으니 입을 수 있고 샘이 있으니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으니 땔 수 있다」고 네 가지 가함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사가 재에서 시를 썼다.
「봄바람은 새 기운을 부채질하고
아침해는 맑고도 고와라
서쪽들녘에 나가니
밭고랑이 얽혀 있구나」고.
바로 여기가 아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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