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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진폐증환자와 동고동락 「음지의 삶」에 바친 인술 42년|대전 선병원장 조창원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난치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 구원의 인술을 펴온 의사 조창원씨(67·내과의·대전시 유성구 지족동 선병원 원장).
그는 온 사회가 차갑게 등을 돌려 외면하기 일쑤인 문둥병·페결핵·진페증 환자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어왔다.
의사생활 42년을 한결 같이 소록도·탄광촌 등 오지로 떠돌며 인술을 펴온 그는 음지 속에서 스러져 가는 생명들을 건지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불씨로 삼아온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자신의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다보니 어쩌다 이렇게 됐고, 세상사람들이 평가해주니 삶이 헛되지 않았구나 안도할 뿐』이라고 그는 담담히 말한다.
1926년 평양에서 광산·제재소 등 사업을 하는 부유한 가정의 6형제 가운데 5남으로 태어난 의사 조창원의 올곧은 삶은 6·25동란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야전병원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평양의전을 거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서 군의관으로 입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혹한 부상자들을 돌봤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을 전혀 모르는 채 귀하게만 자랐고 부모의 뜻에 따라 별 생각 없이 의사가 된 그는 아비규환의 전쟁터를 보고 평생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가슴에 지니게 된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부모·형제를 배에 놓아둔 채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쓰라린 아픔 속에서 『먼 훗날 혹 만날지도 모를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늘 다짐해왔다.
부산5육군병원·홍천2야전병원 등을 돌다 휴전과 함께 군의관을 그만 둔 그는 36세 때인 61년 여름 대부분의 의사들이 기겁을 하며 가려하지 않았던 나병환자들의 집단촌인 소록도 항을 자원해 부인 등 가족과 친지·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홀로 국립소록도 병원장에 부임한 그는 신임인사차 7천5백여 환자들과 운동장에서 첫 상면하는 자리에서 후덥지근한 여름바람이 실어 나르는 「살 썩는 냄새」의 충격을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되새기곤 한다.
그가 전쟁 중에 얻은 마음의 상처는 이 소록도의 충격과 함께 더욱 깊어졌고 그는 하늘이 나환자들에게 준 「천형」에 온몸으로 항거하기 위한 대역사에 착수했다.
그는 우선 나환자들의 처절한 절망을 삭이기 위해 섬 곳곳에 「나병은 낫는다」 「나병은
유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구호판을 수없이 내걸었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병원 종사자들이 마스크·위생장갑을 착용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 병원직원 거주 지역과 병동을 갈라놓았던 철조망도 철거시켰는가하면 미감아동·직원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놀게 하는 등으로 환자들의 얼음잠 같은 마음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그는 사회에서 돌팔매질 당하고 쫓겨다니는 나환자 및 그 가족들의 자립과 정착을 위한 터전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바다를 메워 생활터전을 만드는 간척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늘 육지사람들에게 배신감·모욕감을 느껴온 환자·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은 외롭고 험난했다.
결국 그의 간곡한 정성은 나환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수천여 환자들 앞에서 『간척사업의 결과가 환자들을 위한 것이 아닐 경우 맞아 죽을 각오가 돼 있다』는 내용의 서약까지 한 후 이 일에 착수할 수 있었다.
『소록도에 부임한 신임원장이 딴 목적이 있어 환자들을 강제 동원해 간척사업에 투입하고있다』는 등 온갖 모함 속에서도 고흥반도 남단의 득량만을 메워 3백30만평의 땅을 만드는 작업은 3년여 계속됐다.
손끝·발끝 등이 귀 『썩어 없어진 2천여 문둥병 환자 및 그 가족들이 나서 수심8m나 되는 바닷속으로 큰돌과 흙을 끝없이 져 나르는 이 작업은 수시로 휘몰아치는 폭풍우촵파도에 의해 돌둑이 여러번 무너지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환자인부가 흙더미에 깔려 죽는 일도 발생, 원장이 터무니없는 일로 사람까지 죽게 했다고 원성이 드높았다.
그의 피땀어린 노력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고스란히 담겨져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고 아직도 이 섬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바다를 막아 나환자들에게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해 주려던 그의 뜻은 안타깝게도 간척사업을 큰 이권으로 여긴 사람들의 모함으로 사업의 80%를 완성시킨 단계에서 중단해야 했고 그는 결핵환자 치료전문인 국립마산병원장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됐다.
『세상이 허무하고 싫어져 여러번 죽음을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한 그는 다시 털고 일어나 생활방편 없이 병상에 오래 누워 있는 결핵환자들의 가족에게 농토·집을 마련해주는 정착사업을 위해 정신없이 또 뛰었다.
그 뒤 부산국립재활원 원장시절에도 부모의 무지와 궁핍으로 방치된 재활 가능한 불구자들을 골라 무료수술을 주선, 새 삶을 찾아주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어느 곳을 가나 끊이지 않는 그의 헌신적 삶은 곳곳에 알려져 6년만인 70년 소록도의 나환자 곁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흐지부지됐던 간척사업이 다시 시작됐다. 또 양돈·양계·마늘 생산을 통한 수입증대와 판로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환자 및 가족들에게 삶의 자신감을 심어준 후 그는 모두 7년여 계속됐던 소록도에서의 생활을 마감했고 온갖 말썽 속에서도 간척사업은 마무리됐다.
강릉 가톨릭성모병원을 거쳐 80년 그는 강원도 탄광촌을 찾아들어 분진이 폐에 쌓여 죽어 가는 진폐증 환자들을 위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근로복지공사산하 태백시 장생병원원장·규폐센터소장을 맡아 환자들과 병실에서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고 꺼져가는 생명들에게 「당신 곁에 내가 있고 나는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일요일·공휴일도 마다 않고 환자를 돌보는 「무휴제」를 스스로에게 선언했다.
그는 지난 연말 장생병원에서 정년퇴직, 나성의 종합병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나 그의 정성을 잊지 못하는 진폐환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이 병원은 자연스럽게 진폐전문병원이 돼 버렸다. <고혜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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