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새콤달콤책읽기] 먼저 떠나간 친구의 컴퓨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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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토야마 씨,

'바다에서 기다리다'(권남희 옮김, 북폴리오)를 읽은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3월 22일 당신의 서울 강연회에서 제가 진행을 맡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일정표에 따르면 우리는 당신이 서울에 도착하는 날 저녁부터 사흘 내내 만나기로 되어있었지요. 당사자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은 채 손님을 맞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 책의 첫 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대형서점 서가에 꽂힌 당신의 책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손을 뻗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어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많은 일본 작가의 소설들이 경쟁적으로 번역 출판되고 있고, 저는 그것들을 일일이 찾아 읽을 만큼의 열의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요. 고백컨대 자국 작가들보다 동시대 일본 젊은 작가들의 신작이 더 자주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 대해 얼마간은 복잡한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이상하지요? 누군가가 쓴 문장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당신의 문장들은 놀랍도록 쉽고 덤덤했습니다. 공연한 멋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았고 앞을 향하여 묵묵히 나아가면서도 묘한 유머를 품고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양념 없이 슴슴하게 간을 맞춘 맑은 국물을 떠먹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중편분량의 소설을 정신없이 읽고났을 때 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가늘게 흔들렸습니다. 아주 작은 것.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돌이킬 수 없는, 반짝이는 것. 당신의 소설을 읽고 감동 받았다는 말을 제가 했던가요? 하지 못했다면, 동업자끼리의 쑥스러움 탓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만난 당신은 당신의 문장들처럼 담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후토짱이 정말 당신의 친구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지요. 옛 동료 후토짱이 소설 속에 자신을 등장시켜 달라고 졸라서 당신은 "그럼 네가 죽어야하는데 괜찮겠어?" 라고 물었다고 했어요. 그래도 상관없다며 마냥 기뻐했다던 후토짱. 이토야마 씨, 우정이란 그런 것인가 봅니다.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으면 남겨진 자가 떠난 자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폐기해주기로 '바보 같은 약속'을 하는 소설 속 그들처럼 말이에요.

우리들은 도시락상자 혹은 관(棺)처럼 생긴 하드디스크를 하나씩 깊숙한 곳에 숨기고 삽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별모양 드라이버로 컴퓨터를 열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은색 거울 같은 원반'을 꺼내어 아무도 못 보게 찍찍 긁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친구를 다들 가지고 있을까요? 아, 물론 그 친구도 절대로 내용물을 보아서는 안 되지요. 그 정도만 믿을 수 있는 타인이 있다면 벼랑 끝에서도 덜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사무칩니다.

이토야마 씨, 언젠가는 군마에 꼭 놀러가겠습니다. 후토짱과 함께 따뜻한 술 한 잔 나눠요. 부디 건필하시길….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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